"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을 너무 사랑하는 것이다."
1960년 1월 4일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알베르 카뮈는 대학시절 나의 우상이었다.
-어머니의 책장에 꽂혀 있었던 그의 잠언론 '다시는 자살을 꿈꾸지 않으리라' 표지사진을 보고 제임스 딘인줄 착각했을 정도다.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요, 철학자로 분류됐지만 끝끝내 실존주의자라는 호칭에는 반대했다.
왜일까?
카뮈의 소설을 보면 실존철학의 향기가 풀풀 풍기다 못해 넘쳐나는데도 말이다.
우습게도 실존철학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철학을 얘기하자면 구조주의 철학이다.
물론 철학에서 '대척'이라는 표현이 가능하다면 말이다.
사회학적으로만 따져보면 구조주의는 개인의 존재 의미를 사회적 관계망에서 찾는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인생의 의미가 있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반면 실존주의는 '나'에게 천착한다. 도대체 '나'는 왜 있는지, '나'는 이대로여도 좋은 것인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타인과의 관계설정은 그 다음 문제이고,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문제로 치부한다.
샤르트르의 "타인은 지옥이다"는 표현은 바로 이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결코 타인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다. 샤르트르에게 타인은 '혐오'의 대상도 아니니까.
다른 말로 진정한 실존주의자는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다른 사람에게 별 관심이 없다. 당연히 사랑하지도 않는다. 엄밀히 '자신을 사랑한다'는 표현도 잘못됐다.
실존주의자에게 '나'는 거의 유일하게 혐오감을 느끼는 존재이다. 그래서 샤르트르가 말한 '구토'가 올라온다.
그런 실존주의자가 소설을 쓴다면 어떨까? 온통 '나' 밖에 없지 않을까?
나만의 생각 속에 빠져서 존재를 탐구하며, 이 우주 속에서 어떻게 해야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 고뇌하는데 타인에 대한 공감이나 배려가 있기는 힘든 것이 당연하다.
이런 소설을 읽는 건 힘들고, 가끔은 '구토'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라고 쓴 소설이니까. 당연히 대중에 인기 있는 소설이 되지도 못한다.
카뮈는 예외다. 그가 달리 천재일까?
철학자 보다는 소설가로 불리길 원했던 카뮈에게 '실존주의자'라는 호칭은 노땡큐였을 것이다.
'당신은 독자를 공감하지 못하는 작가요!'
라는 비난일수도 있으니까...
나이가 들면서 그때는 몰랐던 진실들을 하나씩 알게된다. -나이 먹어 좋은, 거의 유일한 것 아닐까..
내 소설은 어줍잖게도 실존주의를 내재하고 있다. 아무리 재밌다고 써도 전부 내 고민일뿐이다.
누가 '나'밖에 모르는 사람의 소설을 재밌다고 읽어주고 공감할 것인가? 애초에 공감을 바라지도 않았으면서.
최근에 사실상 처음으로 sns에 '손'을 들이면서 공감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다른 사람의 고민과 어려움을 읽으면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가능한 내 글을 나에게 떨어뜨리고, '나'와의 거리를 유지하려 애쓴다.
사랑하는 연인처럼 '인기'라는 잡히지 않는 그녀를 꼭 안으려면 '나'를 조금은 떠나 보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또. 나. 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