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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드나잍호텔 Aug 22. 2022

나의 유년시절 덕질 역사




유년시절의 나는 (물론 기억속이라 조금 또는 많이 변형되었을 수 있지만) 공상과 상상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그때 나는 그림책읽기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책들을 하루에 몇권씩 읽으며 그 책에서 묘사한것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듯한 기분에 자주 휩싸였다.

유튜브로 영상을 봐버리는 요즘 아이들이 느끼는 자극보다 훨씬 더 큰 자극과 환상적인 느낌이 모든 감각을 건드리는 느낌들은 여전히 떠올려도 황홀한 기억들이다.

12살즈음 읽었던 다락방의 꽃들은 어린소녀가 읽기엔 충격적인 내용들로 가득해서 왜 이책을 읽어 보지도 않고 베스트 셀러라는 이유로 선물을 해주었을까 싶기도 했다.

물론 나는 다락방의 꽃들을 다 읽었고 한동안 생생한 그 장면들을 머릿속에 상상하면서 밤새 두근거리고는 했었다. 그렇게 받은 자극 들은 그림으로 이어졌다.

일곱살 즈음 엄마가 그린 그림을 보고 더 잘그려 보고 싶어 심혈을 기울여 그린 그림이 내게 “나는 그림을 잘그리는 구나.” 라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줬고 그림그리기는 일생을 걸쳐 가장 즐기고 잘하고 싶은 취미가 되었다. 업이 될 수 도 있었지만 늘 취미로 감춰 두고 싶고 또 업이 되는 순간 휴식과도 같은  이 즐거움을 잃을까 두렵기도 했다.


어린시절 놀거리가 부족한 아이들은 자연을 관찰하거나 곤충을 모으거나 현미경을 사서 들여다 보거나 하기도 하고 할 수 있는 모든 운동을 다 하기도 하고 각자 저마다의 타고난 자질대로 자신을 발

견해 나갔다. 유년시절의 나는 의외로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다. 방한구석에 그 방한구석에서도 더 코너 쪽에 배를 깔고 누워 하루종일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며 혼잣말을 하던 아이였다. 중얼중얼 그림속의 인물들을 연기하며 스토리를 만들어 나가면 세상에 외로울것이 없었다.

전형적인 외향성을 드러낸것은 14살 전후였는데 춤추는 것에 자신감이 생긴 이후 였다.

장기자랑에 나가 비범한 막춤을 추던 반장 여자애의 춤을 보고 충격을 받은 나는 여름방학 내내 노래 한곡을 틀어 놓고 오토리버스로 돌려 들어가며 하루종일 춤을 췄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 장기자랑에 나가 신들린 춤사위를 펼쳐 보이고는 한동안 춤을 제일 잘 추는 아이로 불리운 적도 있었다. 그 뒤에 선생님들이나 친구들로부터 쏟아졌던 관심이 부끄러웠지만 달콤했던 기억이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쯤 되서 완벽한 안무를 숙달한 친구들의 등장으로 더이상 열정이 없었던 나는 댄스계를 은퇴했다. 그 뒤로 꽂힌것이 ‘영화’ 였다.


우리집에는 매달 로드쇼와 스크린을 사모으는 나보다 앞서 영화광이었던 오빠가 있었고 자연스레 나는 매달 그 잡지들을 탐독했다. 물론 오빠의 영향으로 홍콩영화 광이 되었다.

그 중 내 영혼을 송두리째 사로잡았던 영화는 ‘중경삼림’ 왕가위의 영화를 본 순간 채널 v를 통해 보던 이미지와 영상의 화려함의 그 이상을 경험했고 완전히 그 영화에 빠져들었다.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매일 듣고, 금성무의 인터뷰 기사를 모조리 외우는 등 한 영화에 그렇게 깊이 빠져 본것은 전무 후무 한 일이었다. 매일 대여섯권의 만화를 쌓아 두고 내용에 흠뻑 빠져 보다가 저녁이 되면 좋아하는 영화를 무한히 돌려 보며 등장인물에 나를 대입해 상상하다 잠들고는 했다.

그 즈음 학교에서 나는 이야기꾼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그때의 자질이라면 충분의 귀여니 이전의 작가가 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그때의 나의 상상의 세계는 풍요로웠다. 지금 회상을 하면서 그때의 내가 아깝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파고 들었던 다양한 책과 영화들이 주는 영감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세상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서 내가 늘 다짐하는 것이 있는데, 우리아이들이 이렇게 덕질을 하기 시작한다면 난 어떤 분야 라도 좋으니 받아 들이는 세상을 아이들이 표현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다.

음악을 만들고 싶어 건반으로 나만의 멜로디를 만든다면 미디음악을 할 수 있도록 장비를 마련해주고, 기타가 치고 싶다면 기타를 사주고, 만화를 본격적으로 그리고 싶어 한다면 태블릿을 사주고 싶다. 유년시절의 순간 몰입을 출력해낼 수 있다면 그 만큼 창의적이고 새로운것이 또 있을까-

나는 그래서 이제 세상은 20대가 문화적으로 리드를 하고 있지만 곧 10대가 리드하는 날들이 당연시 될것이라고 예상한다.실제로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  그만큼 유년은 강력하다.



다시 나의 유년으로 돌아와서,

그 뒤에 나의 유년시절은 패션 잡지를 보고 디자이너 이름을 외우고, 브랜드의 시즌별 아이템을 모조리 눈으로 스캔하던 시절로 접어든다. 후에 첫 직장을 선택할때도 그 열정은 지속 되었는데 기대했던 것과 너무도 달랐던 패션계에서의 나의 단순 업무 포지션에 지쳐 전의를 상실해버렸었다.

그리고 그 열정이 지속 되기 에는 청년기의 방황이 너무나 컸다.

내 청년기를 방황이라고 표현하고 혼돈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 만큼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떠올려도 나의 깜냥에 비해 차고 넘치는 자극과 사건들로 가득했던 시기였다. 사실은 i인 내가 엄청난 e 로 살아내기가 정말 버거웠었다.

여전히 e의 탈을 쓴 i로 살아가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내면의 i를 감추고 사는 e는 아닐지 생각해 본다.  이성이 사이드 브레이크로 걸려있는 감성적인 사람으로 살아갔던 내 청춘을 그리려면 그저 신나게 회상하는 글만은 되지 않을 것 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써야 할까.

좀 더 시간이 흐른뒤에는 쓸 수 있으려나.

더 나이가 들면 솔직하고 담대하게 이야기를 풀 수 있을까.

나에 대한 이야기를 쓴 다는 것은 유년시절 말고는 쉬운 일이 아닌것이다.

어떤 사람은 유년시절을 떠올리는 것 자체로 고통인 사람들도 있다. 나처럼 큰 걱정 없이 좋아하는 것들만 즐기며 시간을 보낸사람은 많지 않을 수 도 있다. 또 내게 유년이 늘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어른들의 고통을 죄책감으로 느껴가며 불안에 떨어야 했던 일들도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참 오랜만에 글을 쓰면서 유년시절을 복기하고 나니,

무언가 새로운 덕질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다. 기억은 때론 이렇게 재미없어진 일상에 작은 생기를 불어 넣어주기도 한다. 유난히 취미부자로 살아 온 내가 좀더 깊이 있는 덕질이 하고 싶어진다.

평생 뜨게질이 취미 였다가 은퇴후 작은 니팅샵을 열었다는 호주 에 사는 두 할머니의 사례처럼 나도 나의 덕질이 길게 이어져 덕업일치가 되는것이 소박한, 어쩌면 큰 꿈이다. 오랫동안 그런 꿈을 꾸었었는데 계속  글을 쓰면서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것인지 설계해 봐도 좋을것 같다고 생각이 든다. 끝없이 계속 되는 나와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덕질을 찾아내는일, 유년시절을 다시 떠올리고 써보면서 드는 새로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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