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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드나잍호텔 Oct 17. 2022

석잔의 커피와 일곱잔의 술


밤은 언제나 두려움이 까맣게 짙어지는 시간이다. 길과 길 사이를  찾아 들어 노천에서, 2층의 바에서


마시는 술은 그 두려움을 옅게 만들어 준다. 낯선 골목의 으슥한 기운도 술을 마시고 걷다 보면 낭만적인 풍경으로만 보인다. 나에게 용기를 가져다주는 술을 마시며 서울의 곳곳을 탐험했던 지난밤-


LP 판으로 음악을 틀어주는 바에 앉아 화이트 와인 한 잔을 마셨고, 옷이며 잡동사니가 가게 한구석에 잔뜩 쌓여 있었던 어수선한 바에서 맥주를 또 한잔 마셨다.


그렇게 길을 걷다 커다란 창문이 활짝 열려 있는 커피숍에 자리를 잡고 진한 커피도 마셨다.


마시고, 마셨고, 마셨던 지난밤 -


일요일 저녁에 모여 여행 같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도시여행자가 되었던 밤이었다.


길가의 가로등이, 술집 안의 붉은 조명이 마냥 따스하게 느껴졌던 쌀쌀한 가을날의 도시여행.


요 근래 두 번 찾아온 남영동 일대의 분위기는 홍대, 연남, 망원동 일대의 분위기와는 또 달라서 어른들의 세계라는 인상을 준다. 좀 더 어른스러운 취향의 것들이 눈에 많이 보인다.


문화가 있는 동네에 대한 갈증이 해소되는 시간들이다.


집 문을 열고 나가면 재미있는 가게들이 하루가 다르게 문을 열고 골목 곳곳에 보물 같은 이야기들이 묻힌 상점들을 찾아내는 즐거움에서 오랜 시간을 살다가 돌아온 이 동네에서의 삶은 생활에 지친 사람들의 얼굴을 보는 일만으로도 힘이 빠지고는 했다.


매일 가볍게 웃으며 눈인사를 건네던 이웃들과 헤어져 다소 굳은 얼굴의 사람들을 대하면 내 마음도 경직돼 버렸다. 그래도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나니 살갑던 이웃이 있던 자리에 하루 건너 하루 찾아와주는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는 또 새로운 환경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래도 전에 살았던 동네들에 비하면 호기심 많은 나를 충족시켜주는 새로울 것이 없는 지금의 환경이 당최 만족이 안되어 휴일이면 재미를 찾아 나는 코를 킁킁거리며 탐험을 계속한다.


언제쯤 재미있는 곳이 될까? 이곳은- (이쯤 해서 약간 한숨이 섞인다.)


작년까지만 해도 내가 이 동네를 주도적으로 재미있게 만들면 된다는 열의로 가득 차 있었는데, 아무래도 지금 나는 현실 적응을 마친 사람이 되어 주어진 대로 살아내는데 급급해진 모양이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크루아상이나 베이글을 파는 가게가 집 앞에 있으면 좋겠어-라든지


한 집 건너 한 집 우열을 가리기 힘든 맛을 자랑하는 작은 카페가 있었으면 좋겠어-라든지 귀여운 책방이나 맛있는 젤라또 가게가 여기 있으면 딱 좋을 텐데- 하면서 동네에 작은 상점들의 위치를 혼자 상상해 본다. 집 근처에 그나마 예쁘게 자리했던 휘나 이 시에 가게가 문을 닫아서 서운한데 그 자리에 또 미용실이 들어 온다니 살짝 실망도 했다.  


커피와 술을 번갈아 마시며 아쉬운 것을 곱씹는 시간도 어쩌면 낭만일 테지-


다시 또 내 생각을 두들겨 패주고 정신을 차린다. 제일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배부른 우울’이니까 더 이상의 투정은 부리지 않기로 하고 술을 마저 마셨다.


나는 마치 무대를 찾아 헤매는 한물 간 가수처럼 무대에서의 짜릿함과 휘황한 조명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시간이 나면 모든 것이 그림처럼 세팅된 곳으로 찾아 드는 것 아닐까 생각했다.


나만의 이야기가 있는 공간은 갖고 싶지만 그 공간에서 매일 모든 시간을 보내는 것은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르는 감옥 같은 일이다. 잘 알기에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아름다운 감옥 (일지도 모르는) 천국을 찾아 나오는 것일 테지. 그래도 술에 취한 이 밤은 천국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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