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조리원 천국이라고 했지만, 나는 유난히 그곳이 적응이 안 되고 힘들었다. 이곳을 나간다고 해도 나의 미래는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2주간의 우울했던 조리원 생활을 마치고 친정에서의 조리생활이 시작되었다.
첫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 예정일 한 달 전부터휴직에 들어갔다. 출산 때까지 친정에서 생활하다가 친정 근처의 산부인과에서 아기를 낳았다. 출산 직전 한 달간 친정에서 생활해서 그랬는지 아기를 낳고 다시 돌온 친정은 익숙하고 편안한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편안한 느낌이 들었던 이유는 엄마의 존재였을 것이다. 그때그때 나의 이상한 마음을 언제 꺼내놔도 들어줄 엄마가 있어서 우울한 생각을 좀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말 그대로 좀 나았을 뿐, 지금도 그때를 회상하면 밝은 기운이라고는 전혀 없었던 것 같다. 4시간마다 잠든 아이를 바라볼 때 작은 미소를 지었던 것 빼고는.
거실에 앉아서 잠든 아기를 바라보다가 엄마에게 툭 말을 건넸다. "엄마, 얘는 내가 열 달 동안 품었다가 죽을 고생 해서 낳았고, 지금도 엄마가 분유도 먹이고 엄마랑 나랑 목욕도 시키고 하는데, 얘는 왜 이 씨도 최 씨도 아니고, 정 씨야?" 나의 실없는 소리에도 엄마는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한번 웃고 말뿐 대답이 없다.
조리원에서 나오고 돌아오는 바로 그 주 주말 중학교 때부터 가장 친했던 친구의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내가 아기 낳고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갈 테니 걱정 말라고 했는데, 갈 수가 없었다. 출산이 무엇인지, 출산하고 나면 내 몸이 어떻게 변하는지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너무도 무모한 약속을 했던 것이다. 그 상황이 친구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약속을 못지 키는 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이 상황이 너무 화가 났고 원망스러웠다. 원망의 대상이 없다는 사실이 더욱 원망스러웠다. 결혼식 전날, 친구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내가 네 결혼식을 못 가게 될 줄은 평생, 그리고 한 달 전에도 상상조차 못 했던 일이라며 이야기를 하다가 엉엉 울어버렸다. 늘 감정표현이 활발했던 나와는 달리 덤덤한 성격의 친구는 "괜찮아 울지 마, 괜찮아 울지 마"를 반복했고 나는 우느라 더 이상 말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아마도 뭔지 모를 우울함이 그 기회를 틈타 다 쏟아졌던 것 같다. 옆에서 우리 통화를 지켜보던 엄마가 전화기를 대신 받아 들고 남은 대화를 이어갔다.
"은비야~ 결혼 축하한다. 행복하게 잘 살길 엄마가 기도할게~ 은혜가 못 가서 엄청 속상해한다. 너네 둘이 중학교 때부터 각별했던 거 엄마가 아는데, 어떻게 하겠니... 여자로 엄마로 사는 게 다 그렇단다...."
뒤에는 뭐라고 하시고 끊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와중에 ‘여자, 엄마로 사는 게 다 그렇다’는 말에 꽂혀서. 왜 여자만, 엄마만 그래야 하냐고 악다구니를 쓰며 더 크게 울었다. 본의 아니게 엄마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엄마는 하는 수 없다는듯 말했다. "그냥 가. 그렇게 속상해하지 말고, 엄마가 운전해서 데리고 갈 테니까 아기는 아빠랑 정서방한테 하루 보라고 하던가. 그냥 가자 가."
엄마의 말은 진심이었다. 어릴 때부터 내가 울고불고 떼쓰면 결국엔 어떻게든 내가 원하는 걸 들어줬던 그때의 엄마의 행동과 말투가 그대로 묻어났었다.그렇지만 그 '어떻게든'을 처음으로 고집부리지 않았던 건 태어난 지 3주밖에 안된, 그것도 일주일 넘게 중환자실에서 혼자 입원해 있다가 다시 엄마품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내 아기를 잠시도 곁에서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