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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메이징 그레이스 Dec 29. 2022

닮고 싶은 부모

나의 사람들_일하다 만난 사람

20대 후반, 유학원이라는 곳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다. 지금이야 온라인에 정보가 넘쳐나고 해외에 나가는 일 자체가 꽤 흔한 일이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항공권 구매, 비자 발급, 현지 생활 노하우 등등 정보를 얻고 도움을 받고 싶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약 20년 전에는 취업을 위한 스펙으로 토익과 같은 공인영어성적뿐 아니라 해외 생활 경험 자체가 필수 이력사항으로 자리 잡을 때였다.  지금은 유학원이라는 곳 자체도 많이 사라졌다. 내가 일했던 유학원도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회사였고 국내 지사만 20-30개 정도 달했는데 현재는 반 이상이 자취를 감췄다.

'어학연수'라는 단어도 점점 사라지고 있는 듯하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큰돈을 들여가며 해외에 나가지 않아도 다양한 온라인 프로그램을 통해 원어민 수준으로 영어 실력을 갖추는 사람들도 많고, 어학연수를 온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는 어학원들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했던 일은 회사에서 에듀플래너라고 불렸다. 사내 자격증이 별도로 있을 만큼 교육과정도 나름 체계적이었다. 고객들에게 교육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일이지만 서비스직이었고 무형의 상품을 판매하는 영업직이었다.  그때만 해도 어학연수나 유학을 간다는 것이 소위 돈 좀 있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특별 코스로 여겨졌다. 돈이 많아야 스펙도 더 쌓을 수 있고 취업도 유리한 조건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돈으로 스펙을 만드는 사람들은 출국 전부터 현지 생활까지 돈으로 보호받길 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영국의 경우는 학생비자를 받기 위해 간단한 영어 테스트를 통과해야 했는데,  그마저도 실력이 안되니 돈 더 낼 테니 그것쯤이야 너희가 알아서 해결하라며 큰소리치는 일도 있었다. 대놓고 말만 안 했지 나보고 대신 테스트를 봐달라는 거였다. 항공료에 텍스가 별도로 있다는 내용을 설명하는데 택시비 그거 얼마나 한다고 그것까지 받느냐며 따지는 부모도 있었다.


늘 그런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어학연수가 너무 가고 싶어서 일 년 넘게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았다며 차곡차곡 모은 아르바이트 급여 통장을 통째로 들고 온 학생도 있었고, 형편은 안되지만 부모님이 자기의 꿈을 위해 어렵게 보내주는 어학연수라며 최대한 아끼고 열심히 공부하고 오고 싶다고 돈 아끼고 살 수 있는 현지 생활 노하우를 묻는 학생도 있었다. 어떤 경우든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디디며 꿈을 좇는 사람들을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건 의미 있는 일이었다. 오히려 내가 그들에게 자극받고 성장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내 일을 사랑하며 행복하게 일했던 시절이었다.




햇볕이 서서히  뜨거워 지던,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6월. 수원의 한 대학교에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어학연수 상품을 홍보하고 있었다. 멀리서 키 크고 마른 남학생이 하얀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으며 걸어왔다. 그야말로 얼굴에 "나 밝음"이라고 쓰여 있는 학생이었다.


그 학생은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등 각 국가의 장단점을 설명 받고 자신에게는 캐나다가 제일 잘 맞는 것 같다며 캐나다 밴쿠버로 1년간 어학연수를 가기로 결정하였다. 비자 발급부터 현지 학교 등록, 홈스테이까지 필요한 여러 가지를 도와주었다. 학생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부모님 재정 서류가 필요한데 부모님이 우리 유학원에 한 번도 방문하지 않고도 모든 게 차근차근 잘 진행되었다. 이 학생을 담당하며 기분이 좋았던 건 일적으로  전혀 차질이 없었던 것뿐 아니라, 늘 나의 설명을 조용히 듣다가 마지막엔 활짝 웃는 얼굴로 감사하다고 고마움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긍정의 에너지가 뿜어져 나와 주변인까지 행복하게 만드는 그런 학생이었다.


어느 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팀장님이 내 담당 학생 컴플레인이 올라왔으니 확인하라고 했다. 최근 캐나다로 출국한 한*진 학생 건이라면서 팀장님조차도 의아해하며 얘기했다. 현지 홈스테이 문제였다. '드디어 이 학생 부모님과 통화를 하게 되는구나, 하필 안 좋은 일로 처음 이야기하게 되네' 하고 생각하며 컴플레인 내용을 살펴보았다. 홈스테이 가정에서 식사를 챙겨주는 것에 대해 불만이 있어 홈스테이 가정을 변경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출국 전 오리엔테이션으로 홈스테이 문화에 대해 이야기를 다 해줬고 문제없다는 듯 출국했는데 왜 문제가 생긴 걸까 이런저런 걱정을 하고 있는데 학생의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내가 먼저 빠르게 대응했어야 하는데 아차 싶어 약간 심장이 작아진 채로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진이 얘기 들으셨죠? 아 그보다 먼저, *진이가 무사히 캐나다 갈 수 있게 다 너무 편하게 도와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을 먼저 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아, 네 저도 먼저 전화를 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진학생이 워낙 밝고 긍정적이라 준비하는 데는 힘든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요?"

"홈스테이 하는 집이 필리핀 사람들이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밥을 같이 안 먹나 봐요."

"아, 네 캐나다든 호주든 현지 홈스테이 가정들은 생계를 위해 홈스테이를 하는 경우가 많고 (중략) 가족들과 다 같이 식사를 하기보다는 (어쩌고저쩌고)..."

"네 그렇죠. 그런데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홈스테이 바꿔주지 말라고요. *진이가 어릴 때부터 워낙 잘 웃고 밝은 아이에요. 그런 이유로 주변에 늘 자기를 좋아하고 예뻐해 주는 사람들만 있었어요. 그래서 누군가 자기를 싫어할 수도 있다는 걸 몰라요. 홈스테이를 나가고 싶어 하는 것도 그런 상황을 피하려고만 하는 거거든요. 당연히 알지도 못하는 한국 남자애가 갑자기네 집에 왔으니 그들도 낯설겠죠. 아무리 돈 받고 하는 일이지만 식사를 매번 챙겨주는 게 쉽겠습니까. 불편한 상황이 생겼다고 무조건 피하는 건 잘못된 방법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어떤 누구도 자기를 싫어할 수 있다는 걸 배워야 하지 않겠어요?"

"아... 그렇군요. 저는 그래도...."


나는 이미 할 말을 잃었었다. 돈 싸주며 어학연수 보내는 많은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먼 타국에서 조금이라도 힘들어할까 봐, 어떠한 이유로라도 자기 자식이 상처받는 일을 막기 위해 전정 긍긍했었다.  그게 완벽하게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는 것 같으면 항의를 하거나 환불을 요청하거나, 얼굴을 붉히고 지속적으로 컴플레인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런데 이런 전화는 1년 넘게 일하면서 처음이었다.


학생의 어머니와 몇 가지를 더 확인하고 대화를 마쳤다. 거듭 죄송하다고 말하는 나에게 너무 애쓰지 말라고, 이런저런 경험 다 해보라고 그 멀리까지 보낸 거라고, 다 자기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하셨다. 내가 컴플레인을 해결해야 하는 입장이었는데, 오히려 학생의 부모님이 나의 무거운 마음을 덜어주고 계셨다. 통화를 마친 후 캐나다에 있는 학생과 통화를 했다. 역시나 특유의 밝은 말투로 반갑게 내 전화를 받았다.


"그게 컴플레인으로 접수되었요? 난 그런 줄도 모르고 그냥 홈스테이 여기 빨리 나가고 싶어서 문의 글을 쓴 건데 선생님한테 그렇게 전달되는 줄 몰랐네요."

"식사하는 게 많이 힘들어요? 원래 많은 홈스테이 가정이 자기네들 식사시간에 같이 식사 안 해요. 이건 제가 말씀드렸던 거긴 한데..."

"네 뭐. 괜찮아요. 그냥 내 방앞에 식판 갖다 놓고 그래서 첨엔 황당해서 내가 표정관리가 안 됐나 봐요. 영어도 부족하고 말이 안 통하니까 내 표정만 보고 제가 화내는 줄 알았던 것 같아요. 저는 그게 영 불편해서요. 근데 영어를 못 해서 말로 잘 표현을 못 해서 그런 거니까 차차 좋아지겠죠."


학생의 어머니와 학생, 두 사람과 통화를 마치고 많은 생각이 교차했었다.




그때 나는 20대 후반이었고 결혼도 안 했고 자식은 당연히 없었다. 누군가의 자녀로만 살아온 인생이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 그때 일을 아직도 떠올리게 된다. 내 자식에 대해 저렇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가진 것을 무기 삼아 내 아이들을 두둔하려 하지는 않을까. 많은 부모들이 과잉으로 자식들을 감싸는 모습을 보아오면서도 부모니까 그럴 수 있고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다. 큰돈을 지불 한 만큼 그 대가를 당당히, 아니 그 대가 이상의 무언가를 보상받고 싶어 하던 여러 고객들과 상반되는 모습이 적잖이 충격이었다.


사람을 만나는 일을 하면서 항상 무언가를 배운다. 그날도 뜻밖의 것을 배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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