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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메이징 그레이스 Jan 02. 2023

나는 자랑스런 아빠의 업적 1

[나의 사람들] 나의 친애하는 아빠 _1

결국, 시말서를 써야 했다. 이직한지 고작 3개월 밖에 안 되었는데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왜 시말서를 써야 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처음 써보는 시말서라 인터넷을 뒤져 양식을 찾았고 최대한 내용이 적게 들어가도록 편집했다. 쓰라고 하니 쓰는데 도무지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몰랐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모르겠는데 시말서를 쓰자니 억울해서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냥 내일부터 출근하지 말아버릴까?’, ‘시말서가 아니라 사직서를 써버릴까?’ 이백 번도 더 고민했지만, 결국 시말서를 썼다. 이런 식으로 회사를 그만두기는 싫었다.


입사하자마자 회사는 큰 프로젝트를 따 냈고 회사에 적응하기도 전에 그 중 하나의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경력직으로 이직을 한 것이긴 하지만 기존에 해왔던 일이랑은 규모 자체가 차원이 달라 힘들었다. 내가 이렇게 덜컥 프로젝트 하나를 맡아도 문제가 없을지 걱정이 됐다. 일이 좀 버겁고 어렵긴 했지만 하루하루 일을 마치고 퇴근 할 때 마다 무사히 오늘도 무사히 끝난 것에 안도하며, 잘 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늘 아슬아슬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내 모습이 다른 사람들 눈에도 안타깝게 보였나보다. 동료들이 나를 안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었다.

그 프로젝트 자체가 우리 회사가 이행하는 게 말이 안 된다고 했다. 회사 자체에서도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아무리 경력직이라지만 새로 들어온 직원한테 그 일을 맡기는 건 무리라며 나의 어려운 상황을 대신해서 읽어주었다. 낯선 환경에서 힘들어 하는 나를 보고 내 입장에서 한마디 해 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위로가 되었다.


내가 담당했던 일은 싱가포르 단기 연수 후 현지에서 취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싱가포르를 가 본 적도 없거니와 그 나라에 대해 알고 있는 게 거의 없었다. 그야말로 생판 모르는 나라였다. 싱가포르에 대해 책과 사진, 인터넷으로 공부했다. 싱가포르로 취업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상담을 하려면 적어도 그들보다 내가 더 많이 알아야 했다. 취업 전 어학연수 코스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진행했다. 취업을 위해 부족한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 현지에서 취업하기 전, 그 나라를 미리 경험하고 문화를 익히는 시간으로 두 달간의 어학연수 기간이 세팅된 것이다. 그러나 지원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영어를 배우면 취업이 보장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말이 되는가, 두 달 영어 공부 한다고 싱가포르에서 바로 취업이 된다는 게. 그 말이 안 되는 시스템으로 회사에서는 지원자를 모객 했던 것이다.


시작부터 출국 직전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일단 지원자 전원이 어학연수 시작 일에 맞춰 출국 했다. 한숨 돌리는가 싶었는데 일주일도 안 되서 문제가 계속 터졌다. 학교에 갔는데 문이 닫혀 있다는 둥, 우리 지원자들은 2개월 어학연수를 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학교가 2주 후에 문을 닫는다는 둥, 이 프로그램 담당자는 나인데 내가 모르는 사실들이 속출했다. (현지 랭기지스쿨을 ‘학교’라고 칭하겠다) 상부에 보고를 할 때 마다 혼이 났다. 수속담당자가 뭐하는 거냐며 현지에 연락해서 수습하라고 했다.

왜 안 해봤겠는가. 전화를 하면 현지 담당자는 툭하면 자리에 없다고 했고, 나중엔 심지어 2주 동안이나 신혼여행을 갔다며 2주 후에 연락을 달라고 했다. 더 답답한 노릇은 이 나라 사람들 특성인지 늘 천하태평이었다. 나는 속이 타들어 가는데 상대방의 차분하고도 친절한 태도는 결국 날 울게 만들었다.

어느 날 싱가포르 현지 협력업체에서 말도 안 되게 입장을 바꾸고 신혼여행을 간 담당자를 대신했던 또 다른 담당자도 또 2주간 갑자기 휴가를 간다며 연락도 뚝 끊어버렸다. 내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일들이 줄줄이 생기고 문제는 심각하게 커져갔다. 우리와 계약된 어학연수 기간이 끝나면 이 학교는 재정적인 문제로 문을 닫는다고 했다. 지원자들 사이에서 떠돌던 소문이 진짜였던 것이다. 현지에 있는 우리 지원자들의 분노는 커질 대로 커졌고 불안한 마음에 시간 상관없이 계속 연락이 왔다. 우리 어학연수만 하고 돌아가야 하는 거냐, 취업 알선은 어떻게 되는 거냐. 이거 사기 아니냐, 여기 두 달간 팔자 좋게 영어공부 하러 온거 아니다. 등등... 결국 대표님이 직접 현지로 출장을 다녀와야 했고, 결과적으로 회사에 큰 손실을 입혔으니 시말서를 쓰라는 것이었다. 그때의 나는 갓 서른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내막은 이러했다. 내가 입사하기 전, 회사는 사업 예산을 줄이기 위해서 현지 어학연수 비용을 최소화해야 했다. 학교가 재정적인 문제로 곧 문을 닫게 될 것을 알았지만 우리가 제시한 금액으로 어학연수 프로그램을 진행을 해주겠다는 곳이 없었으므로 그 학교와 계약을 했던 것이다. 그런 위험요소들은 뒤로 다 숨긴 채 제안서를 작성해서 승인을 받았다. 소문대로 현지 학교의 직원들은 하나 둘 자리를 비웠고, 신혼여행을 갔다는 직원도 돌아오지 않았다. 지원자들은 사기를 당했다고 항의가 심해졌고 나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지원자들이 한국에서 이 일을 겪었다면 아마 우르르 회사로 쳐들어와 소동을 피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때쯤 나는 경찰에 잡혀가는 꿈까지 꾸었다. 언론사에서도 찾아와 인터뷰를 하는데 모자이크가 된 내 모습이 티비에 나오는 것이었다. 아마 잠꼬대도 했을 것이다. “저는 몰랐어요. 저는 정말 그런 줄 몰랐어요…….”  


야근을 하다가 10시가 넘어 퇴근하는 일이 잦았다. 택시를 타고 올림픽대로를 지나가는데 한강야경이 눈이 부시도록 예뻤다. 밤의 풍경은 나를 위한 선물 같았다. 잠시 걱정을 내려놓고 창밖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이제 퇴근하는 중이라는 말에 놀라면서 피곤해서 어떻게 하냐며 걱정하셨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내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고, 괜찮다는 말만 몇 번 더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때부터 눈물이 차올랐다. 엄마 목소리를 들어서인지 엄마 아빠의 모습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언젠가 나처럼 지쳐 있는 아빠의 뒷모습을 본 것 같다. IMF 시기를 힘겹게 보내고 있었을 때였을 것이다.

‘엄마 아빠도 억울하지만 무조건 참아낸 경험이 있겠지? 그리고 무조건 참아낸 이유 중에는 분명 내가 있었을 거야.’ 아빠의 그 힘없던 어깨에 내가 앉아있던 모습이 그려졌다. 그때는 철이 없을 때라 깨닫지 못했다. 아빠가 힘들다는 걸 알아차렸어도 모르는 척 했었을 것이다. 다 지나간 일인데도 불구하고 아빠가 불쌍해져서 눈물이 더 굵게 흘렀다. 아빠를 떠올리니 무조건 버텨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너무 억울하지만, 진짜 힘들어서 도망가 버리고 싶지만 아빠를 생각해서 한번만, 무조건 견뎌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짐을 하며 볼 위로 흐르던 눈물을 손으로 닦아냈다. 창밖의 야경은 내 눈물의 렌즈를 끼고 빛이 번져나가 밤의 수채화를 그려냈다. 매일 이렇게 예쁜 한강의 야경을 보는 것도 하나의 행복이라 생각하니 억울한 마음도 조금씩 사라져갔다.


힘든 날들이 얼마간 더 이어졌지만 괜찮았다. 괜찮다고 말하면 신기하게도 괜찮아 질 만큼 힘이 더 생겨나기도 했었다. 내가 일을 더 잘하게 되어서 그 사건이 마무리 된 것은 아니지만, 버텨 낸 만큼 인정도 받게 되었고 회사 생활은 야근마저 즐거워지는 날이 왔다. 넋 놓고 바라만 보던, 감상에 젖게 만들었던 서울의 야경은 이제 다르게 보였다. 반짝이는 밤의 불 빛 중에는 내 것도 있었다. 저 예쁜 야경을 내가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으니 어쩌면 억울함을 견뎌내고 워커홀릭이 되었었는지도 모르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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