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곁에도 누군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 수많은 동화 가운데 가장 마음 깊이 다가오는 이야기를 하나 꼽으라면 <미운 아기오리>라 할 수 있다. <미운 아기오리>가 전하는 메시지는 한결같다.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가치를 발견하며, 결국 우리 모두는 존중받아야 할 존재라는 진리를 일깨워 준다. 두 남매를 키우다 보면 이 메시지는 더욱 절실하기에 엄마가 된 나에게 <미운 아기오리>는 최고의 동화이다.
나의 일곱 살 딸아이는 매일같이 묻는다.
여자 아이돌 포카를 보여주며 “엄마, 이 친구가 더 예뻐? 저 친구가 더 예뻐?”
영화나 뮤지컬을 본 후에도 “안나가 예뻐? 엘사가 예뻐? 신데렐라가 예뻐? 백설공주가 예뻐?”
그 끝없는 질문 속에서 나는 일부러 대답을 미루거나 동시에 두 가지를 택한다. 하지만 둘 다 예쁘다고 말해도, 아이는 끝내 누군가를 택할 때까지 물음을 멈추지 않는다.
예쁜가 안 예쁜가에 매달려 있는 아이의 세계를 보면 늘 걱정스럽다.
‘이 나이대에만 머물다 사라질 집착일까? 아니면 어른들의 세상처럼 점점 더 짙어질 굴레일까?’
사실상 외모지상주의가 더 만연한 쪽은 아이들이 아니라 우리 어른들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거워진다.
어느 날 아이와 <미운 아기오리> 함께 보던 중, 그림 속 다른 오리들의 표정을 찬찬히 살피던 딸이 물었다.
“엄마, 얘네는 아기 오리가 못생겨서 저런 표정 짓는 거야? 못생겨서 저리 가라고 한 거야?”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아이가 가리킨 다른 오리들 그림을 천천히 다시 보았다. 그림 속 풍경은 너무나 현실 세상 같았다.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덜 예쁘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배척하는 모습. 이런 사실적인 표현이 새삼 소름 끼치도록 놀라웠다.
그때 불현듯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아이에게 고백했다.
“엄마도 어릴 때 아기오리처럼 못생겼다고 놀림받은 적이 있어. 그래서 엄마의 이모를 찾아가서 엉엉 울었었어.”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자기 눈에는 예쁘기만 한 엄마가 그런 말을 들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사실 어린 시절 이야기가 아니었다. 대학 시절, “못생겨가지고 얼굴 관리 좀 해라”라는 말을 들은 날, 나는 굳은 얼굴로는 도저히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친구를 만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나는 나의 하나뿐인 이모를 찾아갔다. 환한 얼굴로 반갑게 맞아주던 이모는 내 표정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무슨 일이냐”는 짧은 물음에 나는 내가 들었던 그 말을 짧게 뱉아 버리고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다. 이모는 더 묻지도, 위로의 말을 덧붙이지도 않고 내가 실컷 울도록 내버려 두었다.
울음이 조금 잦아들자 이모는 나지막이 물었다. “너한테 그런 말 한 애는 예뻐?” 나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모는 특유의 유머로 “예쁜 애한테 그런 소리 들어서 다행이네. 못생긴 애가 그랬으면 더 억울하잖아.” 하고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울다가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한참 울고 난 후 내가 조심스레 “엄마한테는 말하지 마, 알았지?”라고 말하자, 이모는 고작 그게 걱정이냐는 듯 안심이라는 표정을 짓고 소리 내어 웃었다. 이모는 그날 나에게 “넌 예쁘다”라는 위로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괜찮아지기를 묵묵히 기다리며 곁을 지켜주었을 뿐이다. 이상하게도 그 침묵이 나를 가장 가볍고 홀가분하게 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예쁘고 예쁘지 않은 건 중요하지 않다는 걸.
마음 편히 집으로 돌아가며 그저 이모의 존재가 감사하게 느껴졌다. 내 곁에서 나를 온전히 받아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큰 축복으로 여겨졌다.
그로부터 20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나는 엄마가 되어 딸아이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
“혹시 언젠가 엄마에게 말하기 힘든 일이 생기면, 엄마는 괜찮으니까 너도 이모에게 가서 얘기해도 돼. 그럼 엄마의 이모처럼 이모도 다 들어줄 거야. 네 곁에는 늘 너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걸 기억해.”
아이에게 비밀을 만들자고 한 말이 아니다. 다만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혼자가 아님을 알려주고 싶었다.
외롭고 힘든 순간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그럴 때 곁에 있는 단 한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우리는 다시 걸어 나갈 수 있다. <미운 아기오리>는 결국 아기오리가 백조였음을 드러내지만, 그 결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긴 여정을 끝까지 견뎌낸 힘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자기만의 빛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 시간을 건너는 동안, 누구나 넘어지고 흔들리며 스스로를 의심하기도 한다. 그때 필요한 것은 완벽한 조언이나 화려한 위로가 아니라, 단지 “나는 네 편이야”라고 말해줄 수 있는 누군가의 온기다.
우리는 흔히 삶의 의미를 거대한 성공이나 특별한 성취에서 찾으려 하지만, 정작 우리를 지탱하는 힘은 지극히 사소한 자리에서 온다. 어릴 적 이모가 그랬듯, 곁에서 함께 울어주고, 아무 말 없이 옆을 지켜주는 그 존재야말로 인간이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선물이다.
그래서 나는 어른으로서, 엄마로서 그 역할을 감당하고 싶다. 내가 아이의 백조가 되어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자기만의 빛을 발견할 때까지 곁을 지켜주는 조용한 동반자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아이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러한 사람이 되어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결국 우리는 모두 미운 아기오리 같은 시간을 지나간다. 그 시간을 건너는 힘은 내 안의 가능성에서 오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를 믿어주는 누군가의 존재에서 비롯된다. 서로가 서로의 곁이 되어줄 때, 비로소 삶은 덜 고단해지고, 세상은 견딜 만한 곳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