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속 결말 너머, 아이와 엄마가 함께 생각하는 현실
(딸아이가 6살, 아들이 9살때 썼던 글이다.)
우리 집 6살 언니는 몇 달째 신데렐라 뮤지컬에 푹 빠져 있다.
집에서 틈만 나면 신데렐라 놀이, 1인 다 역. 그중 새엄마 역할을 가장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한다.
“딱 보면 몰라~? 난 신데렐라 새엄마!
착한 척하는 신데렐라 때문에 나만 미움받는 계모가 됐어!”
몰래 영상을 찍으려 하면 귀신같이 눈치채고 못 찍게 해서, 아직 동영상 제대로 건진 게 없어 속이 상할 지경이다. 새엄마 연기를 표독스럽게, 기깔 나게 하던 언니가 갑자기 누워 질문을 던졌다.
“엄마는 신데렐라에서 누가 제일 불쌍해?”
“엄마는, 새엄마가 제일 불쌍해.”
“왜? 신데렐라가 불쌍하지!”
“신데렐라가 뭐가 불쌍해. 착하게 살아서 복받고 왕자님 만나서 행복할 텐데! 이 나라에서도 쫓겨난 새엄마가 불쌍하지. 계속 나쁜마음을 가지고 살거 아니야.”
“아냐! 신데렐라가 불쌍해.”
아이들은 종종 답을 정해놓고 질문을 던진다. 엄마의 동의와 공감을 바라는 것이다. 엄마가 자기 말에 동의해 주지 않자 아이는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여섯 살 아이가 내가 건넨 “새엄마가 불쌍하다”는 말을 이해했을 리 없다. 그저 대수롭지 않게 웃고 넘어가려던 찰나, 지금 아홉 살이 된 첫째가 막 여섯 살 즈음이었을 때, 신데렐라를 읽어주고 함께 나누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때 나는 괜히 화가나서 말했었다. 돌이켜보면, 아이의 눈높이와 엄마의 감정은 언제나 같은 리듬으로 맞춰지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내 표정을 읽고, 내 대답을 기다린다.
“**아, 너는 신데렐라처럼 멍청하게 살지 마라. 저건 착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거야.”
아이는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다가 말했었다.
“그래도 마음씨는 곱잖아.”
아직도 그 말이 생생하다. “이 엄마 왜 이러지…” 하는 표정과, 순간 잠깐 나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그 말.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 부드럽게 딸아이에게 말했다.
"만약에, 만약에 말야,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는데 어떤 어른이 너를 괴롭히고 못살게 굴면, 신데렐라처럼 살지 마. 세상엔 마술사도 없고, 마부로 변할 생쥐들도 없어. 만약 누군가 너를 그런 식으로 함부로 대하고 괴롭히면, 경찰서에 가서 신고해. 도와달라고 용기내서 말해야해."
명작 동화나 전래 동화를 함께 읽다 보면, 불편한 생각이 꼬리를 문다. 공주 이야기들은 특히 그렇다. 아이는 단순한 즐거움 속에서 공주를 만나지만, 나는 어른이라 세상을 더 입체적으로 보고 만다. 그래서 이번에도, 나는 동심을 흔드는 말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신데렐라는 새어머니와 언니들을 용서했어요.
그리고 왕자님과 결혼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그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말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얼마나 오랫동안 속아왔던가.
물론 그 의미를 깨닫는 과정이 곧 어른이 되어가는 길일 테지만, 엄마와 나눈 대화들이 언젠가 아이들이 어른으로 성장하는 길목에서 불현듯 떠오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단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동심 브레이커 엄마로 동화속 주인공들을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