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간다는 두려움, 살아간다는 선물
전래동화는 늘 비슷하다. “옛날 옛날에”로 시작해, 착하고 성실한 주인공과 욕심 많고 심술궂은 인물이 등장한다. 이야기는 대체로 착한 이는 복을 받고, 욕심쟁이는 벌을 받는 구조로 흘러간다.
얼마 전 딸아이가 공주 이야기가 아닌 <이상한 샘물>을 들고 와 읽어 달라 했을 때, 순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만나게 될까?’ 기대했지만,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실망감이 스쳤다.
“옛날 옛적 산골 마을 오두막에 착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았어요. 자식은 없었지만, 마음만은 늘 부자였지요.”
아이도 이미 결말을 짐작했을 것이다. 그저 이번에는 어떤 방식으로 착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복을 받게 될지 궁금했을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뻔한 결말로 향해가는 이야기를 읽어나갔다.
착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비록 자식도 없고 가난했지만, 서로 사이가 좋고 마음만큼은 부자였다.
우연히 산속에서 ‘젊어지는 샘물’을 발견한 할아버지가 청년으로 변하고, 이어 할머니도 젊어진다. 소문을 들은 욕심쟁이 영감이 샘물을 마시다 아기가 되어버리고, 노부부는 그 아기를 기쁘게 키우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산다.
책을 다 읽어준 후 아이의 표정을 살피면 항상 아쉬운 표정이다. 딸아이는 보통
"엄마, 한 개만 더 읽어주면 안 돼?"라고 하는데 그날은 달랐다.
"이 샘물 우리 엄마도 떠다주고 싶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 말속에 담긴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늘 허리가 아프다고 말하던 나, 얼굴의 주름과 늘어나는 흰머리에 한숨을 쉬던 나. 아이는 나의 노화를 매일 곁에서 목격했고, 그 마음을 담아 동화 속 샘물을 건네고 싶었던 것이다.
"엄마가 젊어졌으면 좋겠어?"
"나는 엄마가 지금도 예쁜데, 엄마가 자꾸 아프다 그러고 흰머리 싫다고 하니깐."
그 대답은 부끄럽고도 따뜻했다. 어쩌면 나의 무심한 한탄이 아이의 마음에 작은 흉터로 남아 있었을지 모른다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아들이 더 어렸을 때 일이 떠올랐다. 아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내 노화를 바라보며 누구보다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지금의 딸보다 더 어렸을 때 내가 주름이 는다, 엄마 늙는다라고 말하면 엄마는 주름살이 하나도 없다는 억지를 부렸다. 그런 아들이 귀엽고 재밌어서 일부러 얼굴을 더 구겨가며 웃어 보였다.
"여기 봐, 주름살 있지? 여기도 봐 이것도 주름살이야."
아들은 눈가와 입가의 내 주름살을 가리켜 그건 주름살이 아니라고 했다. "웃음살"이라고 했다.
너무 웃겨서 깔깔 소리를 내려던 순간 아들은 하지 말라며 목놓아 울어버렸다. 예상치 못한 큰 울음이었다.
세월이 흘러 초등학생이 된 아들에게 다시 물었다. 이제는 좀 컸으니 속마음을 좀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엄마가 늙는 게 왜 그렇게 싫어?"
아들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조금씩 조금씩 늙다가 죽을까 봐."
그날 우리는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다 꼭 끌어안았다. 나는 아이의 마음을 다 알 것 같았다. 나의 부모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이가 나의 늙음을 두려워하듯, 나는 언젠가 부모님이 내 곁에 없을까 봐 두려웠던 적이 많았다. 우리는 서로의 시간 속에서 그렇게 연결되어 있었다.
아이들의 바람대로, 내 욕심대로 내가 늙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젊어지는 샘물이라니, 순간 딸아이의 말대로 그 물 한 컵만 마셔보면 참 좋겠다 생각도 들었다.
학창 시절을 함께 보냈던 오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우리는 꼭 “그때로 돌아간다면”을 말하곤 한다.
다른 선택을 하겠다, 아니면 똑같이 살겠다, 말은 길어지지만 늘 결론은 같다.
“그래도 지금이 제일 좋아.”
현재가 충실하지 않다면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행복할 수 없다. 그때를 이야기하며 웃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지금을 살아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잠깐 친구들과의 대화를 떠올리고 나니, 노부부가 젊어진걸 정말 좋아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또 물었다.
"근데 젊어진 부부는 젊어져서 정말 좋아했을까?"
"당연하지! 허리가 이렇게 펴졌잖아."
아이는 단순하게 대답했지만, 그 대답은 내가 무심히 내뱉던 말들의 그림자였다. 아이 앞에서 언어는 현실이 되고, 말은 삶의 무늬가 된다.
동화 속 노부부가 젊음을 얻었을 때 진정으로 행복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안다. 젊음은 선물이지만, 늙어가는 시간 속에서 사랑을 배우고 함께 머무는 것 역시 선물이라는 사실을.
샘물을 마시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하루하루 서로를 통해 젊어지기고 늙어가며 살아간다. 동화의 결말은 언제나 뻔하지만, 현실의 이야기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동화책의 마지막 페이지는 젊어진 부부가 아이를 품에 안고 행복해하는 모습으로 끝난다.
그리고 아이의 말에 찬성하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래 맞아! 젊어져서 정말 좋겠다. 그리고 이 욕심쟁이 할아버지도 착한 부부가 다시 키우면 욕심쟁이로 안 크고 착하게 클 거야. 그렇지?"
정말 젊어지는 것이 행복일까? 아이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젊은 엄마’가 아니라, 사라지지 않고 오래 곁에 있어주는 엄마일 것이다. 나 역시 부모님에게 그러하듯.
동화 속에서는 ‘샘물 한 모금’으로 삶이 바뀌지만, 현실은 다르다. 현실은 매일의 대화, 작은 위로, 함께 나누는 웃음이 쌓여 우리를 젊게도, 늙게도 만든다. 젊음은 선물이고, 늙어감 또한 또 다른 선물이다. 샘물을 마시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서로를 통해 젊어지고 늙어가며 살아간다.
동화의 결말은 언제나 뻔하지만, 현실의 이야기는 여전히 쓰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