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빛까지 검은색 스티로폼 판자를 세워 막아버린다. 평수에 비해 턱없이 작은 창문은 공기를 환기시키기 역 부족이고, 그래서인지 천장의 빛과 상관없이 썩 답답한 공간이다.
선생과 보조 선생, 아이들을 합치면 짐짓 100명은 넘을 것이다. 물감 냄새와 이틀 정도 버리지 않은 탁한 물 냄새, 싸악싸악 종이를 넘기는 소리, 들키지 않게 둘에게만 들리는 정도로 나누는 대화 소리, 그러다 나를 발견하고 언제 왔냐며 웃어주는 얼굴.
그런 곳에서 일 한지도 4년을 채워간다. 보조강사, 입시 미술학원에서는 아르바이트를 그렇게 부르곤 한다. 강사라는 호칭은 아이들이 부르는 선생님이라는 호칭만큼 낯 간지럽지만.
몇 년 전에 학생으로 있던 이 곳에서 20대 초반을 꼬박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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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눈에 나는 어떻게 보이려나, 나는 그 시절 지금의 내 나이쯤 됐었을 쌤들을 어떻게 보았더라.
단순히 말하면 이른바 팬심(fan+心)같은 느낌이었고 멋져 보였다. 나이로만 보면 더 웃어른이었던 전임 선생님이나 원장 선생님이 아닌 보조쌤들에게 유독 그런 맘이 들었던 건
나도 곧 저런 대학생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너무 멀지 않은 미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 아닐까.
그때에도 낯가림이 심했던 나는 많은 인원과는 관계없이 늘 다니던 친구 몇 명 하고만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 예외가 있다면 보조쌤들이었다.
언니 자매가 없던 나에게는 딱 동네 대학생 언니 느낌이었다. 친근하게 먼저 말을 걸어주고 얘기를 나누다가도 (말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내 수준에 맞춰주셨던 게 아닐까 하는)
전 날 하루 종일 과제를 하느라 밤을 새웠다느니
모은 알바비로 몇 달간 해외여행에 갈 거라느니 그런 것들이, 고3인 나는 할 수 없는 일들이라 퍽 멋있어 보였다.
학교 하교 후 저녁식사만 하고 바로 학원에 간 터라 늘 교복, 후드티, 체육복의 돌림노래였던 이들 틈에서 매일 바뀌는 개성이 담긴 사복들도 한 목 했다.
평소보다 조금 더 꾸민 느낌의 옷 일 때면 ㅇㅇ쌤 오늘 너무 예쁘다고 친구와 주책을 떨곤 했으니 이 정도면 팬심이라 할 만하지 싶다.
원장님이 말하시곤 했듯이, 입시 학원에서 보조쌤들의 존재는 대학을 가고 싶다는 동기를 주는 역할이 될 때도 있었다.
그때의 쌤들의 나이가 되었지만, 그 쌤들과 나의 모습은 글쎄다.. 그다지 겹쳐지지 않는다.
여전히 학교를 졸업하고도 멋있는 쌤들(이제는 언니들)의 모습이 투사되기 때문일지는 모르겠지만.
때문에 그다지 멋이 있지도 않은 나에게 아이들이 주는 '주접의 힘'은 사랑스럽기 그지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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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에게 전하는 무조건적인 긍정과 응원이, 단순히 혼이 난 걸 북돋아주기 위해서만이 아닌 걸 너희는 모를 터다. 너희가 나에게 분명 의도치 않게 주었을 에너지들이 적지 않게 나를 일으키고는 해서 그저 되갚곤 하는 것뿐이야.
그러니깐, 그래서, 나에게 말해주곤 하는 문장들을 곧이곧대로 너희 스스로에게도 말해주었으면 한다고 오지랖을 부려본다. 젊어서라던가 학생이라서 라던가 그런 건 일단 모르겠고 세상이 떠들어대는 단편적인 표면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맑고 깊은 아이들이라. 너희를 볼 일이 없어졌을 때까지도 이때까지의 기억은 이따금 나를 배우게 하겠지.
서로 장난을 치다가도 본인의 말이 상대에겐 장난이 아닐까 봐 금세 사과를 더하는 것도, 이런 거 잘 표현을 못한다며 꼬박 감사하다는 말을 붙이는 것도,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고, 똑 부러질 줄 알며, 자기만의 고집을 부릴 줄 아는 것도, 그 나이다운 것도 그 나이 답지 않은 것도 나는 너네들을 보며 배워가곤 한다.
짧지 않은 1년의 시간 중 부모님보다도 자주 얼굴을 마주하는 몇 달도 있지만, 아주 보통은 이 허옇고 네모진 곳을 나가면 더 이상 얼굴 볼 일이 없곤 하지. 너네가 준 온도가 워낙 따듯해서 4년 동안, 4번을 겪어도 잘 익숙해지지는 않지만 언젠가 이때를 기억에 올릴 때 마냥 힘들지만은 않았던 그런 기억으로 남는다면 그거면 됐지 싶다.
너희보다 약간 서투른 내 온도가 그 기억에 묻어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