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있는 집을 놔두고 비장하게 현관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쏟아지는 열기에 나는 잠시 뒷걸음을 쳤다. '아, 맞다. 지갑.' 하마터면 오늘도 지갑 안의 돈을 확인하지 않고 나갈 뻔했다. 어젯밤처럼 힘들게 책방에 갔다가 책 한 권 사지 못했던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됐다. 나는 왼발로 현관문을 지탱한 채 손바닥만한 핫핑크색 지갑을 열어보았다. 지갑에는 현금이 만 육천 원 정도 들어있었다. ‘이 돈으로 책을 2권 이상 사기에는 부족할 텐데, 집에 다시 들어갈까?' 혹시 모르니까 지폐를 더 챙길까 고민했지만 귀찮았던 나는 가려던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
책방으로 향하는 길목마다 햇볕이 쨍쨍하게 내리쬐었다. 무겁고 뜨거운 공기에 숨 쉬기가 힘들었지만 나는 묵묵히 걸어갔다. 매앰-매앰 - 붉은색 보도블럭에 발자국을 딛을 때마다 나무 위에서 매미 울음소리가 울렸다. 더운 공기에 땀이 한 방울씩 이마를 타고 내려왔다. 매미들은 땀을 흘리는 내 모습이 우스운지 더욱 우렁찬 소리로 나를 놀려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위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챈 나는 재빨리 머리끈을 풀었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은 흘러내려 얼굴을 반 쯤 가렸다. 아무도 나를 쳐다보고 있지 않은 데도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시선은 나의 한심한 학교생활을 꿰뚫어 보는 듯 매섭고 날카로웠다.
책방은 내 유일한 소통창구였다. 사람이 많은 다른 곳은 무서워하면서 이곳만 유일하게 사람이 많아도 상관이 없었다. 처음에는 동네 책방 그다음에는 대형책방으로 차근차근 사이즈를 늘려나갔다. 유동인구가 많은 강남 교보문고도 괜찮았다. 책방에만 들어서면 체력포션을 먹은 것처럼 기운이 났다. 신기하다. 다른 곳은 오히려 기운이 빠지던데 기운이 채워지는 걸 보면
학교에 나가지 않으면서 나는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다니고 있던 학교 교복을 볼 때마다 흠칫거렸다. 혹시나 나를 알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게 될까봐 불안했던 나는 주변을 살피며 길을 걷곤 했다. 차를 타고 다닐때도 교복만 보면 괜히 시선을 피했다. 병이 있었지만 나만 혼자 학교를 째는 날라리가 된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그들은 볼 때마다 빳빳한 교복차림이었고, 나는 항상 편한 평상복 차림이었다. 내 어깨에는 교과서로 가득 찬 가방도, 실내화 주머니도 없었다.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다. 나는 '학생'이 아니었다.
'뭐야, 학교에도 안 나오면서 돌아다니는거야? 아파 보이지도 않구만.' 겉으로는 이상 없어 보이는 내 모습이 혹여 오해를 삼을까봐 나는 함부로 밖에 나가지 않았다. 밖에만 나가면 모든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주시하는 느낌이 들었다. 뻥 뚫린 대로변인데도 숨이 턱턱 막혔고, 지구의 중력이 내 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나는 더운 여름날에도 머리를 풀어서 얼굴을 가리고 다녔고, 길가에 사람이 한명이라도 보이면 고개를 숙였다.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나는 바깥에 나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집 안에만 있으면 편하고 좋은데 왜 사서 고생하려고 그래.' 매미는 그런 나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더 큰소리로 울어댔다.
후미진 계단을 따라 지하상가로 조금만 내려가면 오른쪽에 책방 입구가 보였다. 투명한 유리문이 햇빛에 반사되어 일렁였다. 문을 밀자 팅커벨의 날개짓 소리같은 종소리가 들렸다. 딸랑- 진한 초록색 벽을 잡고 계단을 걸어 내려오다 보면 왼쪽으로 책들이 꽂힌 책장들이 나타났다. “어서오세요-” 책방 직원은 계단 위에서 내려오던 나를 잠시 보더니 짧은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를 향해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내가 자주 가던 동네 책방은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 해리포터가 지팡이를 사기 위해 나타난 마법사의 거리 '다이애건 앨리'처럼 입구가 눈에 띄지 않았다. 평일 낮이라 한적한 책방은 나만의 아지트 같았다. 도로변을 걷다가 다리가 저려와도 책방에만 들어서면 저절로 체력이 회복되는 느낌이 들었다. 기분이 좋건, 좋지 않건 심심할 때 책방에 놀러가는 게 유일한 낙이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희귀병을 가진 사람이나 학교를 가지 않는 학생이 아닌 그저 인간으로 존재했다.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았고, 관심 있게 쳐다 보지도 않았다. 나 역시도 책에 눈이 팔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아무도 자신을 신경 쓰지 않을 장소에서 천천히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시선 같은 건 신경 쓰지 않는 내가 존재했다. 나는 직원분에게 책방에 갈 때마다 인사를 하면서 사람들이 의외로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분들은 '학생이 낮에 책방에 왜 왔지?'하며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자기 일을 하기에 바빴다. 아마 길을 걸어가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도 자신의 일상에 바빠 주변에 신경 쓸 일이 없을 것이다. 나 조차도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다. 내가 느꼈던 시선들은 학교를 가지 않은 죄책감, 희귀병이 있는 비정상적인 존재라는 생각에 갇혀 내 스스로가 나에게 벌을 준 셈이었다.
우리가 여행을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그래도 역시 집이 최고다!'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시선에 압박을 느낄 때 책방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편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책방에 자주 오자 직원 분은 내가 책을 좋아한다 생각하고, 책을 2권이나 권해주었다. 그 책의 이름은 각각 <스무살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스무살에 배웠더라면 변했을 것들>이었다. 책 내용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와 같은 아는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책방을 오랫동안 다녔어도 책을 추천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분의 따뜻한 마음씨에 나는 책방을 이전보다 편하게 갈 수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학교 가있을 시간에 왜 책방에 왔냐, 교복은 왜 안 입고 있냐.'와 같은 질문을 하지 않고 책을 주었다. 그 후로 나는 직원분들과 좀 더 가까워지면서 가느다랗지만 끈끈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책방은 폴리스 라인처럼 사람을 보이지 않게 선을 그어주면서 또, 사람들과 연결하는 법을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