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이 따끔거린다.
저 너머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의문을 품은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빛을 드리운 귀신같은 형상이 나타났다.
두 사람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 charlesdeluvio, 출처 Unsplash
“시우야, 정신이 들어?”
엄마 목소리다. '뭐지? 엄마가 왜 나한테 괜찮냐고 물어보는 거지?' 차가운 금속 같은 바닥이 느껴졌다. 엄마한테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물어보려고 했으나 입은 열리지 않았다. "금강반야마라밀경, 금강반야바라밀경."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옮기니 왼쪽에는 아빠가 나를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 ‘여기는 어디지?’ 머리가 찡하고 울렸다. 나는 움직이지 않는 몸을 대신해 눈을 위로 치켜들었다. 내가 엄마의 부름에 대답을 하지 않자 엄마는 산소 캔을 입에 뿌렸다. 치이익- 어두운 공간이 눈이 익자, 나는 패턴을 분석하려고 애썼다. '저 자갈 무늬는 어디서 많이 보던 그림인데...' 갑자기 천장 전등이 켜지면서 주위가 환해졌다. 시야에 회색빛의 익숙한 문이 보였다. ‘현관문이구나. 그런데 내가 왜 여기에 누워있을까?’
기억은 다시 만차였던 주차장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맞아, 이 때부터였어. 어쩐지 운이 좋더라니.
오늘 아침에 나는 캔버스를 사기 위해 엄마와 홍대 호미화방에 갔다. 화방 뒤에 있는 주차장이 만차여서 우리는 할 수 없이 근처 유료 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다. 지하에 차를 주차하고 들어간 건물의 문은 곳곳이 유리였다. 투명한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매서운 찬바람이 안면을 강타했다. 예상치 못한 추위에 심장이 쑤셔왔다. “엄마, 엄마 잠시만.” 나는 급하게 엄마의 팔을 끌어당겼다. “산소 필요해?” “아니, 나 물 좀.” 엄마는 바로 배낭에서 생수병을 꺼내주었다. 시원한 물이 목구멍을 타고 심장까지 부드럽게 퍼졌다. “휴, 이제 가도 될 것 같아.”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은 나의 발걸음을 재촉하게 만들었다.
‘안 돼. 오르막길이다.’
오르막길은 산처럼 높아보였다. ‘전에는 이런 길 없었는데?’ 걷는 보폭을 최소화하는 데도 숨이 차올랐다. 추위 때문인지 머리가 띵하고 아파왔다. 나는 ‘안 되겠어. 이건 절대 힘들어서가 아니야.’라고 위안하며 걸음을 멈췄다. “후아,” 산소를 들이켜도 마시는 것 같지 않았다. 심장은 급속도로 빨리 뛰기 시작했고, 귓가에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들리는 것 같았다. ‘망했다.’ 다리는 후들거렸고 손도 함께 벌벌 떨렸다. 엄마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을 꺼냈다. “산소 줄까.”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빨리 달라고 손짓했다. 산뜻한 공기가 불어오는 산소캔 사이로 길에 버려진 담배꽁초에서 매캐한 담배 냄새가 풍겼다. ‘아, 숨 막혀.’
산소를 마시고 있는 내 모습이 신기했던건지 두 여성이 나를 힐끔 쳐다보며 지나갔다. ‘저기요 다 보이거든요.' 그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나를 훑어보며 쑥덕거렸다. 그 순간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산소호흡기를 하는 모습이 웃긴가?' 나는 기분이 확 상해서 호흡기를 입가에서 떼어냈다. '아 진짜 이래서 밖에서는 되도록 산소를 안 하려고 했는데.’ 또 다른 사람들이 이런 내 모습을 볼까 두려웠던 나는 산소캔을 엄마에게 넘겼다.
주변을 구경하며 느릿느릿 걸어간 나와 엄마는 무사히 호미화방에 도착했다. “역시 하면 된다니까.” 엄마와 나는 25짜리 캔버스 4개를 샀다. 화방을 돌아다니다가 주차 시간이 지날까봐 불안했던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힘들게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길에서 타코야키를 사먹었다. 험난했던 하루에 나는 차를 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얼마후 차는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했고, 집에 다왔다는 엄마의 말에 나는 찌푸둥한 몸을 일으켰다. ‘뭐지, 이상한데.’ 차 문을 열자 머리가 지끈하고 어지러웠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승강기까지 놓인 15개의 계단 중간에 나는 다시 멈춰섰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난간에 체중을 실으면서 한 계단씩 천천히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문은 기다렸다는 듯이 열렸다. 나는 숨도 고르지 못한 채 블랙홀처럼 엘리베이터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엘리베이터가 한 층씩 올라갈때마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앞은 안개 낀 것처럼 뿌옇게 변했고, 숨이 막혀 왔다. ‘엄마 나 물...’ 목소리를 내고 싶어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미치광이처럼 문을 벅벅 긁고 나가고 싶었다. 시원한 공기를 마시고 싶었던 나는 쓰러지려던 순간에 문이 열렸다.
‘살았...’
눈을 뜨고 처음으로 봤던 것은 다름 아닌 천장이었다. 밖에 나갈 때마다 보는 곳인데도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처럼 생소했다. 몇 번을 뚫어져라 확인한 후에야 ‘내가 지금 현관문 앞에 누워있구나’하며 알아챘다. 정신이 든 걸 안 엄마 아빠는 나를 누운 채로 들어서 집 안으로 옮겼다. 따뜻한 마룻바닥에 눕혀져도 가위가 눌린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시원한 물을 마시고 싶어도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을 열 수 조차 없었다. 나는 긴장을 유지한 채 방금 전 상황을 되새김질 했다. ‘그러니까 내가 기절을 한 거지? 그래, 문 앞에서... 기억이 안 나.’
'뭐야, 이게 바로 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기억상실증?' 싸늘한 오한이 느껴졌다. '그럼 내가 깨어나지 못했더라면 죽었을 수도 있었던 거네'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있는 힘껏 악을 쓰며 울부짖었다. ‘내가 살았다! 내가 살아남았다고! 죽지 않았어! 죽지 않았다고!’ 그 후 나는 30분가량 물도 마시지 못하고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있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죽을까 봐 눈도 깜빡이지 않고, 최대한 정자세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마치 누어있는 동상처럼 온 세상의 백색소음을 떠안았다. 다음날, 나는 그 공포를 잊지 않기 위해 그림 일기를 그렸다. 놀랍게도 엄마와 아빠도 그때 일어난 일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화방에 갔다 왔다는 걸 깨달은 순간 전후 상황이 생각났다. '죽을 뻔한' 날,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살아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