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당신도 책상이 필요해?

: 책 <자기만의 방>을 읽고

by 오뉴월의 뉸슬

우리 엄마는 책을 좋아하신다. 아니 좋아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애초부터 우리 엄마에게는 책을 놓고 읽을 책상도, 책을 꽂을 개인 책꽂이도 없기 때문이다. 엄마의 책들은 항상 거실 중앙에 있는 책장 맨 윗칸을 차지 했으니까. 엄마가 잘 읽는 책은 대체로 '꾸뻬 씨의 행복 여행'이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같은 밝고 메세지가 또렷한 도서이다. 그게 아니면 건강 관련 서적을 주로 읽으시는데,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나와는 거리가 먼 분야의 책들을 산다. 엄마는 내가 서점에 가자고 하면 그때서야 마음에 드는 책을 찾아보지만, 책방에 혼자 가겠다고 말한적은 없다. 그랬던 엄마가 나에게 책 한권을 보라고 건네주셨다.





책 <자기만의 방> 은 앞 표지에 무심한 듯 시크해보이는 눈빛을 가진 '여성'이 그려져있었다. 난 그 그림이 저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책 제목이 꼭 소설책 같아 줄거리를 파악하려고 책을 뒤집으니, 까만책 뒷면에는 빨간 글씨로 '여성이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라는 글귀가 강렬하게 적혀있었다. 그 밑에는 조그만 흰색 글씨로 '여성과 글쓰기라는 주제를 다룬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저작 <자기만의 방>은 페미니즘과 모더니즘의 대표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이다.'라는 첫 문장이 눈에 띄었다. '우리 엄마와 페미니즘? 이건 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일까?' 뜬금없었지만, 엄마가 읽어보라고 권한 책들 중에 처음으로 공통된 관심사를 발견한 것 같아 왠지 모르게 기대가 되었다.


서문을 훑어보다, 엄마가 빨간 색연필로 밑줄을 그은 한 문장을 발견했다.


여성이 픽션을 쓰고자 한다면, 돈과 자신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방금 책 뒷면에서도 본 글이었는데, 엄마도 이 문장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생각해보니 우리 집은 나도 글을 쓰고 있고 아빠도 글을 쓰고 있다. 우리 가족 중 유일하게 엄마만 글을 쓰지 못했는데, 고민도 하기 전에 답은 이미 나와버렸다. 나도 그렇고 아빠도 그렇지만 우리 두 부녀는 각자의 방안에 책상과 책장이 따로 구비되어 있었다. 반면에 우리 엄마는 흔히 '안방'이라고 부르는 방 안에 침대와 옷장, 화장대가 놓여있을 뿐 어디에도 앉아 글을 끄적이거나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했다. 엄마도 자신만의 '서재'가 필요했다.

책을 읽은 후, 나는 엄마도 개인적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에게 방을 선물하고 싶었으나 빈 방이 없었다. 방을 만들 수는 없으니 궁여지책으로 내 방에 작은 책상과 책꽂이를 들이기로 했다. 엄마는 그 곳에서 하루일과를 정리하시고, 간간히 독서도 하셨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 가장 작은 방인 내 방에서 공동생활을 하다 보니 여러가지 불편한 일들이 생겼다.


'이건 뭐 나랑 엄마만 불리하고 아빠만 편하잖아?' 안방과 서재, 그리고 내 방을 빼고는 입구방이 따로 있는데, 그 방은 아빠가 주무시는 침대와 피아노가 있어 쉽게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불공평하잖아. 아빠는 침대방 따로, 서재도 따로 있는 데 엄마만 분리된 공간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아." 나는 곧바로 집안 바꾸기 대작전에 들어갔다.





저녁식사 시간에 엄마와 아빠에게 엄마 서재를 만들어줄 계획을 설명하였으나 아빠는 지금이 좋다고 단번에 거절하셨다. 나는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기에 아빠에게 편지를 썼다.


"<자신만의 방>이라는 책이 있는데 엄마가 이 책을 읽고 처음으로 자신도 이 집에서 무언가를 가지고 싶어하셨어요. 엄마는 20년 이상을 '자신만의 공간'이 없는 채 살아오셨어요. 안방은 침대와 옷장이 놓인 곳이지, 엄마가 무엇을 열중할만한 공간은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개인적 공간이 필요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엄마의 불편을 덜어드릴 차례에요. 엄마의 입과 생각을 빌려서 제가 용기를 냅니다. 엄마가 직접 아빠에게 의견을 얘기하면 좋겠지만, 나 또한 엄마와 내가 떨어진 독립적 공간이 필요해요. 계획은 이렇게 저렇게 집을 바꿀것입니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종이 앞뒷면을 뺴곡히 채운 마음은 곧 아빠의 책상 위에 <자기만의 방> 책과 함께 배달되었다.


늦은 밤에 썼던 편지지는 아침이 되어서 돛을 올리고 항해를 시작했다. 잠결에 아빠와 엄마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헉! 벌써 읽어보셨나보다.' 아빠에게 또 무슨 말을 들을까 걱정되었지만 발걸음은 이미 엄마와 아빠가 있는 거실로 옮겨졌다. "당신도 책상이 필요해?" 아빠는 엄마에게 듣고 싶은 대답이 있는 듯 물으셨다. 엄마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뭉뚱그려 말했다. '아니, 엄마가 거기서 그렇게 얘기하면 어떡해요!' 나는 엄마가 확실히 자기 주장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속상했다. '아빠가 뭐 그리 무섭다고.' 나의 계획이 틀어질 것같아 초조하던 중, 엄마가 나와 아빠의 의견을 조정한 방안으로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엄마, 엄마도 드디어 엄마만의 방이 생겨요!" 나는 엄마에게 '해냈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두 손은 허공에서 짝 소리가 나며 엄마의 환한 미소로 이어졌다. "엄마 새로운 책상도 사고 책장도 들여야지. 어떡해, 너무 좋아. 잘됐다." 나는 마치 나에게 첫 공간이 생긴 것처럼 행복했다.






지금까지 그런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아빠도 아빠만의 방이 있고, 나도 나를 위한 방이 있는데, 엄마만 방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혹시 엄마가 엄마만의 공간이 없어서 TV드라마를 좋아하는 건 아닐까? 자신의 생각을 펼치고 고민하고 몰두하는 공간이 엄마에게도 필요하다고 헤아려 본 적이 왜 한번도 없었을까. 엄마도 자신만의 방이 안방 침대와 옷장을 넣는 장소로 전락하고 있는 걸 보고 물음표로 던져 본적이 과연 없었을까. 내가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엄마는 그저 자신이 계속 그래 왔으니 평생 방이 없어도 괜찮다고, 상관없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그게 싫었다. 이제는 가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엄마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좋겠다.



이제부터라도 엄마의 슈필라움에서 엄마가 원하고 좋아하는 걸 찾았으면 좋겠다.



슈필라움 spielraum
타인에게 방해받지 않고 휴식을 취하고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나만의 놀이 공간을 뜻하는 말로, 독일어 '놀이(슈필·spiel)'와 '공간(라움·raum)'을 합쳐 만든 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만의 놀이 공간을 뜻하는 말로, 타인에게 방해받지 않고 휴식을 취하고 심리적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주체적인 공간을 일컫는다. 휴식뿐만 아니라 온전한 자기다움을 되찾고 자신의 삶을 재창조할 수 있는 활동 공간을 뜻한다. 작은 공간이라도 혼자 있어도 지겹지 않고, 마음껏 자신을 드러내며 새로운 삶을 꿈꿀 수 있는 공간이라면 슈필라움이라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슈필라움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