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된다는 말은 없는데
12월 말에 독일에서 사랑니를 뺐다.
예상치 못하던 것은 아니었다. 왕년 건치아로 뽑히기도 했고, 교정도 안 했고, 충치도 없었던 덕분에 한국에서는 치과를 거의 가지 않았었다. 언젠가 한 번 검진 삼아 갔던 방문에서 사랑니를 하나 빼라고 해서 뺐던 기억은 난다. 그 외에는 일 년에 한 번 스케일링을 위한 방문 말고는 치과 문턱도 가지 않았다.
독일에서는 매년 치과 정기검진 두 번, 기본 건강검진 한 번, 피부 검진 한 번, 여자의 경우 산부인과 검진 한 번이 권고 사항이다. 이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이익을 받는 것도 아니고, 하라고 누가 쪼지도 않는다. 하지만 하라는데 하는 게 더 좋지. 다 무료인 데다가 내 몸 건강하자고 하는 건데.
첫 독일에서의 치과 검진에서는 우선 잘 때 이를 가는 것 같으니 이갈이 방지 마우스 피스를 맞춰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사랑니를 빼야 할지 보기 위해 엑스레이를 찍어볼 수 있다고 했다. 그때 바로 마우스 피스도 맞추고 엑스레이도 찍었어야 하는 건데. 독일어가 능숙하지도 않았던 데다가 엑스레이 촬영을 무언가 되게 좋지 않은 것처럼 설명하는 의사의 말에 (거듭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했다.) 일단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나왔다. 많은 독일 사람들이 그저 엑스레이에 거부감이 클 뿐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그렇게 일 년에 한 번 스케일링받고 검진 정도만 하다가, 드디어 마우스 피스를 맞춰야겠다고 다짐을 한 것이 2년 전이었다. 맞추고 나니 삶의 질이 높아진 기분이었다. 천 유로를 넘는 가격을 보험료에서 지원받으니 괜히 의료 보험비 뽕을 뺀(?) 느낌도 들었다. 아, 엑스레이도 찍어야 하는데...
전에 다니던 치과가 멀어 새로 이사 온 집 근처 아주 가까운 치과로 옮겼다. 그곳에서의 첫 검진에서도 역시 엑스레이를 찍고 사랑니를 봐야겠다는 의견을 들었다. 우선은 스케일링을 위한 예약을 잡고, 그다음에 엑스레이를 찍으러 갔다. 동네 치과인 덕분에 예약이 아주 쉬워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은 치과를 들락거렸다. 방사선 촬영 결과는? 남은 사랑니 세 개를 다 빼는 것이 좋겠단다. 지금까지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는데 갑자기 이를 빼야 한다니. 엑스레이 사진을 같이 보며 이가 이쪽 방향으로 다른 이를 계속해서 누를 수 있다는 설명을 듣고 나니 수긍이 갔다.
사랑니를 빼는 곳은 일반 치과가 아닌 또 다른 2차 병원이었다. 치과에서 소견서(위버바이중)를 받아야만 갈 수 있는 곳. 우리 동네 가까운 곳에도 사랑니를 빼는 기관이 몇 군데 있었지만, 치과에서 내게 보낸 곳은 집에서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다니는 다른 병원들이 도보 5분 이내라 그런지 15분은 조금 먼 듯 느껴졌다. 그 병원의 평점과 후기를 보니 좋은 편이기도 해서 그곳에 가서 사랑니 발치 예약을 잡았다. 이 모든 것들이 12월에 일어난 일. 사랑니 발치일이 1월이 되면 한 분기가 넘어가기 때문에 치과에서 소견서를 한 번 더 받아야 한다. 그래서 새해가 되기 전에 해치워버리자(!) 하고 바로 다 뽑아버렸다. 붓기와 통증을 줄여준다는 주사가 있다고 하길래 고민도 하지 않고 추가했다. 비급여였지만 사랑니 발치 자체가 다 무료니까.
발치 이후에는 하면 안 되는 것들과 관리 지침이 빼곡히 쓰인 종이를 받는다. 다른 것도 아니고 잘 보이지 않는 입 속이니 더욱 주의 깊게 관리해야 할 것 같았다. 이틀에서 삼일 정도 금하라는 것은 자체적으로 일주일 넘게 금지하기로 했다. 카페인, 술, 담배, 유제품, 너무 뜨거운 음식 등등 은근 제약이 있었다. 실밥을 뽑기 전이라 단단한 것을 먹기에는 내가 불편하기도 했고. 유제품 종류는 대부분 안 되었지만 그중에 먹어도 되는 것들이 있어 아주 상세하게 설명이 적혀 있었다. 어떤 치즈는 되고 어떤 치즈는 안 되는지까지.
하지만 독일에서 한국 식생황을 하고 있는 나에게는 더욱 중요한 정보가 있었으니, 매운 정도는 어디까지가 괜찮으며 생선이나 해산물 역시 괜찮은지 여부였다. 하지만 그 긴 목록 속에 매운 음식은, 아니 매콤한 음식에 대한 언급조차 없었다. 해산물 역시 보이지 않는다. 여기 사는 사람들 중에 매일같이 매운 것을 먹는 사람들이 그렇게 없나? 내 상황에 맞는 정보를 위해서는 한국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야 했다.
결론적으로는 명절과 연말연시가 낀 와중에도 사랑니 발치 후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음식들을 잔뜩 먹었다. 새해가 밝은 뒤 검진을 위해 방문했을 때도 아주 깨끗하게 관리를 잘했다는 칭찬을 들었다. 딱히 앓던 이는 아니었지만 빼고 나니 시원하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