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독일 넷플릭스에서 한동안 1위에 올라 있던 <YOU PEOPLE>을 보았다. 주제는 대충 다른 문화, 종교, 인종에서 오는 갈등과 포용이다. 꼭 미국이 아니라 다른 국가의 영화에서도 자주 보이는 주제다. 제목은 까먹었지만 한국에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문화 차이를 다룬 영화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감상평은 뭐. 흔하고 뻔한 이야기, 그래서 스트레스는 없는 좋은 타임 킬링용 무비.
넷플릭스 영화 혹평이나 하려고 글을 시작한 건 아니다. 최근 한 이슈를 보며 이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흑인이자 무슬림인 여자 주인공이 백인 유대인 남자친구의 어머니의 예의 없는 행동을 꼬집는 말이었다. 대강 흑인 무슬림과의 접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태도를 지적하면서, 자신과의 모든 일화를 주변에 자랑하거나 자신을 액세서리쯤으로 취급하는 모습에 화를 내고는 자신을 흑인이나 무슬림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봐달라는 말이었다.
이 대사 생각이 난 것은 최근 체코의 국가대표 축구 선수인 야쿱 얀크토의 동성애자 커밍아웃 뉴스와 관련이 있다. 독일이나 주변국들이 전체적으로는 한국보다 성소수자에 열려있는 분위기이긴 하지만, 축구의 세계는 예외라고 한다. 탑급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 중 최초로 자신의 성적지향을 밝힌 선수가 나온 해가 겨우 2021년이란다. 넷플릭스 시리즈인 <퀴어 아이: 독일 편>에서도 지역 축구팀 코치로 일하기 때문에 동성애자임을 밝히기가 힘들다는 사연이 나오기도 했다.
FC바이에른 뮌헨의 나겔스만 감독은 얀크토의 커밍아웃에 대해 “용감하다. 한편으로는 이걸 용감하다고 말하는 것이 슬프기도 하다. 사실 이게 정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고 말했다. (독일에서는 아직까지 현역 때 커밍아웃한 전업 축구선수가 없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바로 그 영화 장면이 생각났다.
내가 남성 동성애자의 존재에 대해 나름의 이미지를 구축한 것은 20년도 전인 십 대 학생 때다. 친한 친구들과 섹스 앤 더시티를 보고, 세븐틴을 읽으며, 다른 대륙의 패션 디자이너들을 동경하며 그들의 뉴스를 좇을 때였다. 유명 디자이너나 패션 셀러브리티 중에는 유난히 동성애자가 많은 듯 보였고, 섹스 앤 더시티는 아마 나 말고도 많은 여자 사람들에게 ‘절친 게이 친구’ 로망을 안겨줬을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한 잡지에서 실제 게이 친구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의 에세이가 실린 것을 읽기도 했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나는 좀 더 다양한 성소수자들에 대해 알게 되었고, 약 십 년 후에는 친한 친구들이 하나둘 커밍아웃을 하기 시작했다. 나의 친구들 중 섹스 앤 더시티 이미지에 맞는 ‘절친 게이 친구’는? 없다. 미디어가 내 머릿속에 특정 소수자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두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순간이다. 외모나 몸매나 목소리가 이렇고, 성격과 취향이 저렇고 해서 게이가 아니었다. 누구는 주민번호 뒷자리의 세 번째 숫자가 3이고, 누구는 8인 정도의 차이랄까.
스트레이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신기하게도 그중 남자들은 주변에 여자 동성애자 친구들이 여럿 있는 반면, 여자들은 남자 동성애자 친구들이 여럿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서로가 굉장히 다른 환경에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성별 차이가 난다니. 같은 성별이면 커밍아웃을 하기가 좀 더 망설여진다거나 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든다는 방증일까.
다시 나겔스만 감독의 기자회견으로. “사실 이건 정상으로 받아져야 한다”라고 했다. 그 대목을 듣는데 순간, 나는 내 성소수자 친구들을 “성소수자” 친구들이 아닌 성소수자 “친구들”로 대하고 있나 되돌아보게 되었다. 영화에 나온 주인공의 예비 시어머니처럼, 가까운 성소수자 친구들이 좀 있다고 그 사실이 나를 열린 사람이나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고 내심 생각한 적은 없었나? 오늘도 편협한 내 머리를 조금이라도 깨워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