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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만의 비밀 언어

by mig

해외 살이를 하면서, 한국 친구들과 함께 한국어로 이야기를 나눈다는 이 단순한 행동이 엄청나게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모국어가 괜히 모국어가 아니지. 공공장소에서도 한국어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괜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는 비밀 언어를 하는 기분도 든다.


다만 독일은 이미 사람들이 이민을 오는 국가로, 많은 곳에서는 미국 다음으로 큰 이민 국가라고도 말하고 있다. 동네 한 바퀴를 돌거나 대중교통을 탔을 때, 길거리를 걷거나 시내를 나갔을 때 독일어가 아닌 언어를 듣는 것이 아주 흔하다. 나만이 비밀언어를 할 줄 아는 것(?)은 아니라는 것.


가끔은 이게 무슨 언어인가 궁금해서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고, 혹시 이게 한국어냐며, 드라마/영화에서 들어보았다며 말을 거는 사람도 있다. 아직까지는 비한국인이 사실 우리 대화를 모두 알아듣고 있었다 (두둥) 하는 일은 겪지 못했지만, 모르는 일이다. 한쪽에서 우리말을 다 알아듣고 있는 어떤 사람이 있었을지도. 나도 한 번은 지하철에서 자기가 요즘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며 자랑스레 떠드는 십 대 학생들을 본 적 있는데, ‘고마워’ ‘사랑해’ 등등을 나열하는 그들에게 굳이 다가가 “야 나 한국인인데 반갑다! “ 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데 한국에서는 내가 알아듣는 외국어를 하는 사람들한테 다가가서 대화를 나눴던 적이 많다. 역시 내 홈그라운드여서였을까.)


남편은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클라이언트와 매일 화상회의를 한다. 베를린 출신의 인상 좋은 독일 아저씨다. 그러다가 이번주에 처음 실제로 만났는데, 그가 점심시간에 전화를 하면서 갑자기 유창한 중국어를 하는 것!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는 중국인 아내와 두 아이와 살고 있고, 집에서의 공식 언어는 중국어라는 것이다. 아이들의 육아를 위해, 아내가 모국어로부터 소외되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로,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집 밖에서도 ’가족들만의 비밀 언어‘로 중국어를 쓸 수 있는 점이 좋다고 했단다.


생각해 보니 우리 시부모님 역시 서로 대부분 헝가리어로 대화를 하신다. 집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라면, 집 밖에서는 이 ‘비밀언어’의 성격이 강하다. 남들이 듣지 않았으면 하는 이야기를 할 때 특히

헝가리어를 하신다. 다만 뮌헨에는 헝가리어를 하는 사람들이 은근 꽤 있다는 것. 한 번은 공연을 보러 가서 헝가리어로 ”시작 전에 화장실을 미리 다녀올까? 지금 가는 게 낫겠지? 옆에 앉아계신 분들이 일어났다 앉았다 불편하실 텐데 어쩌지? 그냥 가지 말까? 아니, 그냥 한 번 실례합니다 하고 여쭤나 볼까? “ 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는데, 옆에 계신 분께서 바로 ”저기요, 비켜드릴 테니까 화장실 다녀오세요 ㅋㅋㅋ“라고 헝가리어로 말을 거셨던 일화도 있다.


물론 모두가 굳이 ‘우리만이 알아듣는 비밀 언어로 이야기하겠어!’ 하는 것은 아닐 테다. 소통하기 가장 편한 언어가 자연스레 나오는 거겠지. 이번주에는 카니발 행사의 정점인 파싱 화요일에 이를 깜빡하고 지하철을 탔다가 여러 그룹 사이에 파묻혀 앉아 있었다. 내 주변으로 네 그룹이 있었는데, 한 그룹은 독일어, 다른 그룹은 아마도 프랑스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나머지 두 그룹은 전혀 알 수가 없는 언어를 말하고 있었다. ASMR처럼 그 말을 들으면서 무슨 언어일까, 무슨 말을 나누고 있을까 상상도 해보면서 목적지까지 갔다. 여러 비밀 언어들을 만나고, 또 사용하면서 사는 일상은 과연 다문화 국가에 살고 있는 재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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