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테스트 후 B1 준비반으로 들어가라 해서 얼떨결에 들어간 B1반. 접수를 위해 사무실로 가면서도 ‘영어로 말해야 하나, 독일어로 말해야 하나’ 고민을 했다. 가족이 독일인이어도 평소에 독일어로 한 마디도 안 해 버릇한다면 이렇게 “낯선 독일인”을 대면할 때 벌벌 떨게 된다.
고민이 무색하게도, 나보다 먼저 와 있던 한 학생이 있었다. 나와 같이 오늘부터 B1 과정을 시작한다고 한다. 외양을 보고 약간 추측할 수 있었지만 역시나, 멕시코 친구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B1 수업을 막 시작하던 올해 1월에는 영어나 스페인어가 독일어보다 훨씬 더 편했다. 같이 사이좋게 교실로 들어갔다. 우리가 스페인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말을 건 스페인 친구와도 금세 말을 텄다. 중국에 갓 도착했을 때도 스페인어 덕분에 중남미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는데, 역시 많은 사람들이 쓰는 언어를 하면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첫 수업, 그리고 첫 주가 지난 후의 소감은 솔직히 말해서 “에게?”였다.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외국에서 어학연수를 하는 것이었을 만큼 나는 이 독일어 수업에 엄청난 기대를 하고 있었다.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주 5일 수업에 매일 네 시간! 혼자서 컴퓨터 모니터만 보고 듣고 읽기를 반복하는 독학 기간 두 달 동안 지쳤는지, 매일매일 나가는 진도가 너무 버겁고! 공부해야 할 단어나 문법이 너무 많고! 막 숙제에 깔려 죽으려고 하는 나 자신을 상상하며 은근 기대를 하고 있었단 말이다!
이러한 기대는 하게 만든 것은 역시나 또 중국에서의 생활의 영향이 컸다. 당시 처음으로 하는 해외 생활에 영어도 중국어도 집어넣기 버거운데 수업도 따라가야 하지, 영어로 해야 하는 숙제는 도저히 끝이 안 보이지, 짧게 있는 동안 중국 문화도 경험하고 친구들도 사귀고 싶지, 그 와중에 인턴십이라든지 뭔가 의미 있는 활동을 기록으로 남기고도 싶지... 그러다 보니 항상 시간이 부족한 것 같았다. A를 하고 있으면서도 B와 C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 어학연수를 하는 친구들은 "중국어 공부"라는 큰 목표가 있으니 열심히 수업을 듣고, 숙제를 하고, 중국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중국어 공부와도 연결되어 있는 셈이었다. 그때 한창 중국어든 영어든 독학하는 것에 지쳐 있어서 누군가 매일같이 나를 앉혀놓고 수업이라도 해 줬으면 하고 바랐던 것 같다.
진도가 빠르지도 않고 숙제가 많지도 않았지만, 꾸준함의 힘은 대단했다. 조금씩이라도 매일 독일어로 된 무언가를 듣고, 읽고, 쓰고, 말하니까 조금씩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짧은 몇 줄짜리 쓰기 숙제를 하는 데도 사전 찾고 문법 맞는지 확인한다고 한 시간이 넘게 걸렸는데 점점 걸리는 시간도 줄기 시작했다.
선생님 운도 정말 좋았다. 작은 지역 온라인 신문사를 운영하는 우리 선생님은 생각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은 분. 단지 초급 수준의 언어를 가르치는 것을 떠나서 말하기나 쓰기 주제를 생각해볼 만한 것으로 많이 주었다. 가끔 강의하다가 어느 한 방향에 꽂혀서 즉흥적으로 선택적인 (B1 수준에서는 너무 어려운) 글쓰기 숙제를 내주기도 했다. 남는 것이 시간이요 할 것은 독일어 공부밖에 없었던 나는 그가 던지는 즉흥적인 숙제를 열심히 받아서, 서툰 독일어로 써서 제출했다. 신문사를 운영하고 취재를 하면서 일어난 에피소드들을 설명해주기도 했고, 60세가 넘은 나이에도 열려 있는 사고를 가진 분이라 (무려 젊은 시절에 베를린에서 공부를 하던 히피였다! 복식사 공부를 하면서 말로만 들었던 히피 운동에 직접 참여한 사람을 만나게 되다니!) 한국을 포함한 다양한 학생들의 나라에도 관심이 많았고 이미 알고 있는 것도 많았다.
반 친구들은 어떤가. 동북아시아인도, 동남아시아인도 하나도 없다는 점에 놀랐다. 그래도 왠지 중국인이나 한국인 한 명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떠오르는 국가들만 나열해보자면 알바니아, 슬로바키아,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에리트레아, 시에라리온, 나이지리아, 시리아 (+쿠르드족), 멕시코, 아르헨티나 등등으로 구성된 반이었다. 덕분에 유럽에 대해서 잘 몰랐던 나는 동유럽과 남유럽에 대해 많이 알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나이도 직업도 배경도 종교도 다 다르지만, 지금은 사는 도시마저 달라졌지만, 시간이 될 때마다 주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있다.
걱정이 무색하게 둘째 달부터는 모의고사 트레이닝이 집중적으로 시작되었다. 모르는 단어들도 여전히 많이 보이지만 내가 누군가. 유형이 정해져 있는 시험에 강한 한국인이다. 모의고사를 몇 번 보니 시험이 어떻게 나오는지 감이 생겼다. 막판에는 듣기/읽기에 집중하고 싶은 그룹과 말하기에 집중하고픈 그룹을 나눴는데, 나는 당연히 말하기 그룹에 들어갔다. 의외로 말하기에 지원한 학생 수가 적어서 거의 개인 지도처럼 선생님과 말하기 시험을 연습할 수 있었다. 시험 전주에는 오전 수업 이후 오후에도 보충 수업을 한 적이 있는데, 공부도 하고 반 친구들이랑도 시간을 보낼 겸 남아서 그 보충 수업도 들었다.
친해진 멕시코 친구와는 학원이 끝난 후 또는 주말에 그 친구 집에 가서 시험공부를 한답시고 요리를 해 먹고 넷플릭스를 보기도 했다. 그래도 나름 말하기 시험 연습을 좀 하기는 함. 벼락치기가 안 맞는 나는 대본을 몇 주 전부터 써 보고, 선생님께 교정받은 후 매일 한 두 번씩 소리 내어 읽었다.
나의 골칫거리였던 독일어 말하기는 이 B1 말하기 시험 준비를 하면서 갑자기 확 늘었다. 지금까지 속에 쌓아두고 있던 단어와 문법들이 터져 나오는 기분. 그 이후에 말하기에 더 자신감이 붙었고, 독일어로 말하는 게 좀 더 마음 편해지기도 했다.
DTZ 시험이 끝나고 일주일 간의 방학을 가진 뒤 학원 친구들과 다시 모였다. 오리엔티어룽 쿠어스 수업이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일어 말하기에 자신감을 얻고, 시험 당일날 학원 친구들이 꽤 어려웠다고 했던 그 시험이 나에게는 쉽게 느껴지는 것을 보고 과감히 월반을 결심하게 된다.
(아, B1 시험은 전 영역 만점을 받았다. 독일어 선생님이 이런 경우는 독일어 선생 경력 중 처음 본다며 농담으로 나보고 미쳤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