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독일 취업, 단호박 먹고 다시 패션으로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려니

by mig

독일어로 자기소개서도 쓰고 이력서도 썼다. 대충 어떠한 분야의 어떠한 직군에 지원하고 싶은지 (그쪽에서 받아주냐는 별개의 문제) 추렸으니 이제 이것들을 회사별로 단어만 조금씩 바꿔 보내버릴 때다. 처음 두세 개 정도 지원을 할 때는 회사 이름, 직무 이름, 각 구인 공고를 보고 맞는 단어를 추려서 녹여넣는 과정이 너무 귀찮았다. 그냥 하나 준비해놓고 쫙 다 뿌리면 안 되려나 생각도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취준생 시절을 떠올려보니 그때는 심지어 각 회사별로 해당 지원 웹사이트에서 지원을 했다. 물론 물어보는 것들이 간혹 겹치기도 했으나 다른 경우도 많아서 마지막 지원 완료 버튼을 누르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새삼 다시 돌이켜보니 퀴즈쇼도 아니고 질문-답변, 질문-답변, 원하는 답이나 정답은 과연 무엇일까 궁금해하며 "정답"란을 하나하나 채웠던 것 같다.


한국에서 처음 구직을 할 때는 현실 파악을 잘 못하기도 했고,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콧대가 높았던 것도 있어서 한 자리 수의 회사에만 지원을 했었다. 다 떨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했던 건지, 그렇게 되면 그냥 다시 또 다른 데 다음에 지원한다는 마음가짐이었는지 도통 모르겠다. 6년 후, 중국에서 일생 최대의 좌절감을 맛본 뒤 콧대는 꺾일 대로 꺾인 나. 독일에 와서 4개월 독일어 학원 다닌 것만 믿고 독일어로 일을 하겠다고 덤비는 나. 이제 현실 무서운 줄도 알고 객관적으로 언어가 부족한 것도 알고 있으니 자신감은 쪼그라든 지 오래다. 게다가 2년이 넘는 공백기. 그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놀기만 한 것도 아닌데 그것이 왜 그렇게 큰 구멍처럼 보이던지. 그래서 이번에는 다짐을 했다. 진짜 몇십 군데, 백 군데도 지원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 남는 것은 시간이요, 한 회사에 지원하는 데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다. 내 전공이나 지난 경력과 큰 관련이 없더라도 내가 할 수 있겠다고 판단되는 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신입, 주니어급 직무면 되도록 많이 많이 지원해보자.


그 다짐은 세 번째 회사를 지원했을 즈음에 와장창 무너졌다. 자의가 아닌 타의적으로.


회사 백 군데에 지원하기는 무슨. 문제의(?) 피드백을 받은 것은 어떤 홍보/PR팀의 주니어급에 지원한 뒤였다. 인턴이나 아르바이트를 해 본 적도 없기는 하지만, 나름 석사 전공이 저널리즘/커뮤니케이션학이었고, 어차피 주니어급이니 일을 일단 시작하고 배우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홍보 분야는 꼭 하고 싶은 업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흥미로워 보이고 궁금했던 분야이기도 했다. 채용 기간이 몇 달씩 걸리기도 한다는 독일 회사답지 않게 지원 후 며칠 뒤 바로 답변이 왔다. 너는 탈락이다, 다음 단계로 가지 못했다, 라는 차가운 메시지는 아니었다. "너 홍보 관련 실무 경력이 없네. 이 직무는 이 분야에서 일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직무야."라는, 친절하다면 이유를 설명해주니 친절하달까 싶은 답변이었다. 이력서를 훑고 관련 비슷한 경험도 없으니 이런 메시지를 보낸 것인가. 아니 근데 주니어라며, 신입 뽑는다며.


독일의 취업 시장은 전공과 관련 경력을 엄격하게 보는 곳이었다. 생 신입을 뽑는 직무에서도 마찬가지다. 경력이 없어서 경력을 만들려고 하는데 경력이 없어서 안된다니요. 구직기간 내내 내가 울부짖고 싶은 말이었다. 알고 보니 이 "실무 경험"이라는 것은 인턴, 워킹 스튜던트 경험을 말했다. 그것이 필요하다면 나는 기꺼이 인턴십부터 시작할 의향이 있었다. 단지 이러한 인턴은 아직 학생일 때만 할 수 있을 뿐. 인턴을 하려면 나는 먼저 학생이 되어야 했고, 학생이 되려면 독일어를 더 공부해서 독일 대학에 입학할만한 어학 성적 (C1 정도)을 받아야 했다. 물론 학교 지원 시 필요한 온갖 서류의 번역과 공증 등등 등등은 덤. 최후의 선택지로 남겨둘 수는 있으나, 충분히 먼저 도전을 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전략을 바꿔야 했다.


다시 차분하게 나의 이력서를 읽어보았다. 전공도, 실무 경험도 모두 패션 쪽에 직무는 항상 오퍼레이션, 커뮤니케이션이 많은 일이었다. 그것을 좀 바꿔보고 싶어서 기술적인 방면과 몇몇 툴 사용법을 배울 수 있는 디지털 마케팅이나 패션에 얽매이지 않고 산업군 선택지가 넓은 제너럴한 홍보, 마케팅, 영업 등에 넓게 지원을 해보려고 했다. 어차피 독일에 와서 커리어를 0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으니까. 그런데 이러한 직무들의 구인 공고를 봐도 다 해당 분야의 Erste Berufserfahrung (첫 실무 경험)을 요구했고, 툴을 다루는 직무들의 경우에는 프로그램이나 툴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명시하며 이것들을 실무에서 다뤄본 경험을 요구했다. '나는 뭐든지 빨리 배우는 편이라 모르고 들어가도 누구보다도 열심히, 빨리 배울 있는데...'는 나만 하는 생각이었다.


전략을 바꿔서 우선 패션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가는 곳들부터 지원을 하기로 했다. 뮌헨에 크고 작은 회사가 많다고는 하지만 패션으로 필터링을 하고 나니 많지는 않았다. 독일은 도시에 따라 잘 나가는 산업군들이 있어서 어느 정도 잡 서칭을 하다 보면 어떠한 도시에는 어떤 산업군의 일자리가 많다는 것이 보인다. 뮌헨은 전통적인 독일 대기업과 IT 관련 (그리고 요즘은 핀테크) 다국적 대기업 및 스타트업이 많다. 내가 지원해봄직한 글로벌한 패션 및 소비재 기업은 뒤셀도르프와 함부르크 쪽에 많이 보였다. 뒤셀도르프에는 또한 여러 은행과 컨설팅 기업들도 있어 문과/경영 전공생들에게 선택지가 많은 듯 보였고, 함부르크는 역시 항구도시라 그런지 유통업, 무역업, 세일즈 쪽 일자리가 많은 듯했다. 물론 둘 다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않아서 세부 사정은 모른다. 나는 일단 지리적으로 뮌헨으로 한정해야 했으니까.


백 군데까지 지원을 해보겠다는 포부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독일 유학, 독일 인턴 경험 없는 문송이가 비벼볼 만한 곳이 과연 뮌헨에 몇십 군데는 될지 오히려 의문이 들었다. 모든 회사들이 상시 신입을 채용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차근차근 패션 또는 내 과거 경험과 연관성이 있을만한 회사들로 지원할 곳들을 추렸다. 당장 사람을 뽑는다는 말이 없어도 우선 채용 페이지를 즐겨찾기에 저장해 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자기소개서도, 이력서도 다 준비를 해놓았는데 막상 내가 지원할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 조금 힘 빠지게 했지만, 그래도 나 하나 들어갈 곳 한 자리는 어딘가 있겠지.


+

모두가 꼭 지원하는 회사나 직무 관련 실무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독일은 비타민 B, 즉 인맥을 위한 취업이 굉장히 흔하기 때문에 가족 또는 지인의 추천으로 관심 없었던, 관련 경험 없었던 분야에서 일을 하게 되기도 한다. 독일 드라마에서도 종종 본인은 관심 없는데 부모님이 지인과 미리 말을 끝내 놓고 "너 다음 주부터 OOO에서 인턴 하기로 했다."라고 통보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그걸 보며 나는 부러움에 부들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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