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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할 때 음식을 최고 순위에 놓지는 않는다. 그 나라나 지역의 특별한 음식이나 맛집을 굳이 찾아가서 먹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음식은 생활의 일부이니, 여행 중에 마주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우연히 만난 새로운 음식은 언제나 내게 전에 모르던 즐거움을 준다.
비네그레트와 아끄로쉬까
모스크바 굼 백화점의 스딸로바야 57에서 먹었던 것들이다. 스딸로바야는 구내식당, 칸틴을 뜻하는 단어로 원하는 것들을 식판에 가져와서 계산하고 먹으면 된다. 우선 생야채 샐러드가 거의 없이 절이거나 소스에 버무린 야채 무침이 대부분이었다. 확실히 추운 지방이구나. 오이와 당근이 많이 보였는데, 둘 다 좋아하는 나에게는 천국. 비트를 사워크림에 버무린 비네그레트 (Винегрет) 샐러드를 처음 먹어봤는데 마치 어제도 먹었던 음식처럼 입에 잘 맞았다. 채 썬 당근으로 담근 고려인들의 김치인 마르코프차 (Морковь по-корейски) 역시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 아닌 것처럼 친숙했다.
최고의 미각적 충격의 주인공은 아끄로쉬까 (Окрошка). 오미자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다양한 맛의 차가운 수프이다. 사워크림과 오이, 순무, 허브 등등이 들어갔는데, 입 안에 한 모금 머금는 순간 신 맛과 매콤한 맛이 입 안에서 팡팡 터진다. 표현력의 한계를 가진 나는 동치미 같다고밖에 할 수 없었는데, 정말 낯설게 생긴 음식에서 왠지 친숙한 맛이 나서 놀라웠다. 이 외에도 차갑고 뜨거운 수프 종류가 굉장히 많았다.
보르쉬
우크라이나에서 왔다는 수프 보르쉬 (Борщ) 역시 어제도 먹었던 것 같은 친숙한 맛의 국이다. 이고리가 한국인 입맛에 이거만 한 것이 없다며 추천한 메뉴이기도 하다. 토마토 베이스에 약간 매콤한 맛이 나고, 고수와 쌀, 고기, 야채 등등이 들어가 있어 덜 매운 육개장 같았다. 이고리는 생선 수프인 우하(Уха)를 시켰는데, 작은 보드카 한 잔을 함께 내어주더라. 육칼 시키면 막걸리 주고 삼계탕 시키면 인삼주 주는 것 같은 건가.
블린
블린(Блины)은 보통 러시아식 팬케익, 또는 러시아식 크레페라고 소개된다. 패스트푸드 체인점인 떼레목 (Теремок)에 가면 수많은 종류의 블린을 곁들여 먹는 수프와 함께 좋은 가격에 먹어볼 수 있다. 막상 먹어보면 팬케익이나 크레페보다는 빙떡이 생각난다. 얇고 흐물흐물하면서 살짝 쫄깃한 식감에, 야채나 고기, 생선을 넣어 본식으로 먹기도 하고 달콤한 것을 넣어 후식으로 먹기도 한다. 재미있는 건 이 블린이 독일에 살고 있는 지금, 우리 가족이 즐겨 먹는 음식이라는 것. 루마니아(plăcintă)에서도, 헝가리(palacsinta)에서도 자주 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는 연어 맛 하나밖에 못 먹어봤는데, 지금은 각종 달고 짠맛으로 원 없이 먹었다.
샤슬릭
이미 충분히 유명한 샤슬릭. 두툼하게 썬 고기를 어떤 양념에 절여 숯불에 구운 것이다. 세 종류의 고기가 함께 나오는 샤슬릭(Шашлык)을 시켰더니 매콤한 소스와 양파 절임이 함께 나왔다. 위에 파도 송송 썰어줘서 너무 느끼하지 않고 맛있었다.
삘메니
역시 이고리가 러시아 물만두라고 소개해준 메뉴. 계속 물만두라고 불러서 원래 이름이 뭔지 메뉴판을 다시 찾아봐야 했다. 우리가 시킨 삘메니(Пельмень)는 매콤한 소고기 맛으로 어떤 향신료 때문인 건지 혀가 살짝 아릿한 맛이었다. 허브 향도 진하고 만족스럽게 맵기도 해서 보르쉬 다음으로 가장 맛있게 먹었던 음식이다. 여기에 우즈베키스탄의 만두인 만트(Манты)도 먹었는데, 이건 코티지치즈가 들어간 맛으로 시켜서 후식 같았다.
나폴레옹 케이크와 메도빅
의외로 러시아 음식 중 하나로 꼽히는 케이크이다. 나폴레옹의 모자 모양을 따서 러시아에서 만든 케이크라고 하는데, 생긴 것은 조금 투박한 밀푀유 같다. 나는 24시간 운영하는 체인점 카페인 세베르 (Север)에서 먹었다. 번화가에 가면 몇 블록 건너 하나씩 보이는 곳. 아냐 말로는 특별히 엄청나게 맛있어서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소련 시절에 거의 유일하게 패스츄리를 파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 시절에야 인기가 많았지만 지금은 더 맛있는 곳들이 많이 생겼다고 한다. 맛보다는 역사와 전통으로 인정받는 느낌. 층마다 크림이 들어간 케이크에 슈가파우더를 엄청 넉넉하게 뿌려줘서 아주 달다. 러시아 꿀 케이크인 메도빅(Медовик) 역시 스딸로바야에서 후식으로 먹었다. 진한 꿀 향이 가득한 폭신한 케이크.
흘렙과 크바스
러시아 사람들의 주식이자 기본으로 먹는 호밀빵인 쵸르니 흘렙(Чёрный хлеб)은 버터가 들어가거나 단 맛의 빵보다 시고 딱딱한 빵을 좋아하는 나에게 그야말로 취향 저격이었다. 그리고 이 흑빵을 발효시켜 음료로 만든 크바스(квас) 역시 고기에 곁들여 먹으니 잘 어울렸다. 알코올이 들어가 있다고는 하지만 술이라고 부르기엔 충분하지 않은 정도로, 전주 모주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탄산도 약하고 흑빵의 신맛은 그대로라 아직도 종종 생각나는 맛이다.
스메타나
사워크림을 대체적으로 스메타나(сметана)라고 부르는 듯하다. 다대기를 풀듯이 따뜻한 수프에도, 차가운 수프에도 듬뿍 넣어 풀어서 먹는다. 딱히 러시아 음식스럽지 않은 팬케익 같은 요리를 시켜도 스메타나가 항상 딸려 나온 것을 보면 사람들이 즐겨 먹나 보다. 과일을 설탕에 절인 콤포트(компот) 역시 여기저기 많이 나온다. 차에도 타 먹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우리 시부모님 역시 모든 수프에 사워크림을 넣어 드신다.
삐쉬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명물이라는 도넛 삐쉬끼(пышки). 당시 환율로 280원 정도에 갓 튀긴 도넛 두 개를 먹을 수 있었다. 맛이 없기가 더 힘든 음식. 슈가파우더를 듬뿍 뿌려 비닐봉지에 넣어주는데, 아직도 그렇게 파는지 궁금하다.
설탕 쇼크
러시아는 추운 나라이기 때문에 기름진 음식과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당분을 섭취하면서도 에너지를 비축하는 줄은 몰랐다. 러시아 여행 첫날 슈퍼마켓에서 산 과일 주소를 한 모금 마셨다가 화들짝 놀라서 통째로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리고 말았다. 콜라인 줄 알고 참기름을 마셨을 때보다 더 심했다. 나는 아무리 맛이 없어도 음식을 잘 남기지 않는 사람인데, 이 주스는 순수한 당분 쇼크 그 자체였다. 설탕인지 시럽인지를 얼마나 넣었는지 액체 농도부터 주스가 아니라 꾸덕한 요거트에 가까웠다.
다음날에는 슈퍼마켓에서 어린이 식품 구역에 있는 야채 주스를 집어 왔다. 주황빛이 돌고 여러 가지 야채가 들어갔다고 쓰여 있는 흔한 야채 주스다. 왜 어린이용은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을까? 시원하게 마시려고 냉장고에 넣었다 한 모금을 들이키고 또다시 펄쩍 뛰고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말았다.
마지막 시도는 초코 카라멜 케이크. 역시 상상 그 이상의 당도를 보여주었다. 찐득한 초콜릿과 카라멜 함량이 남달라 케이크를 썰어먹어야 할 정도였다. 커다란 커피를 옆에 두고 녹이면서(?) 먹으니 한 달 치 당분이 충전된 기분이었다. 물론 이미 카페 라떼를 시켰다가 연유가 들어간 듯한 달달한 커피를 받고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안전한 선택, 스타벅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기억이란 오감으로 하는 것인지라, 여행에서 먹었던 음식의 새로운 (또는 충격적인) 맛을 떠올리면 시간을 그때로 되돌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이때는 몰랐지만, 독일에 살고 있는 지금 몇몇 러시아 음식은 정말 쉽게 접할 수 있다. 동구권에서 자라신 시부모님의 식생활이 러시아 음식과 꽤 비슷해 두 분은 내가 중국/한국 슈퍼에서 장을 보듯이 러시아 슈퍼에서 장을 보신다. 우리 역시 날을 잡고 러시아 슈퍼에 다녀오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