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의대생 아냐와 뻬쩨르 파워 워킹

by m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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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뻬쩨르에서는 이고리만 만나기로 했었다. 나머지 시간은 혼자 잘 보내기 위해 이곳에서도 도보 여행 투어를 예약해두었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 R에게 카톡이 왔다.


"너 지금 상트페테르부르크지? 거기 아냐라고 하는 내 친구 있거든, 번호 줄테니까 한 번 연락해 봐. 네가 간다고 말은 해놨어. 뻬쩨르 출신 의대생이고 착한 애야!"


어차피 별다른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아침에 아냐에게 문자를 보냈고, 바로 그날 점심에 만나기로 했다. 도시의 북쪽에 사는 아냐를 위해 모스크바 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 인연이란. 아냐를 소개해준 친구 R은 카자흐스탄-한국 혼혈로 바르셀로나 유학생이다. 한국으로 교환학생을 왔었는데 마침 R의 한국인 버디가 내 친구였고, 그 친구가 우리를 잘 맞을 거라 생각해 소개해주었다. 아냐는 러시아에서 스페인 학교를 다녔다. 몇 년 전 바르셀로나로 단기 어학연수를 갔는데 그때 플랫에서 만난 것이 R이다. 그리고 R은 서울에서 만난 나를 아냐에게 소개해준 것. 나와 R은 스페인어로 말하기 때문에 아냐를 만나서도 스페인어가 편한지 물었다. 영어를 더 연습하고 싶다는 아냐의 말에 우리의 언어는 영어로 결정. 의대생이 뭐하러 여러 외국어를 배우냐는 말도 많이 들었다고 하는데, 다른 나라가 궁금하기도 하고, 언젠가는 외국에 살아보고도 싶고, 무엇보다도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이 재미있단다. 나랑 잘 통하겠는데?


원래 서어서문학과를 다녔던 아냐는 우리로 치면 반수를 해서 의대로 옮겼다. 그래서 동기들보다 한 살이 더 많은데, 동기들 중에 결혼한 사람이 반이고, 그중 몇 명은 벌써 임신 중이라고 했다. 공부할 것도 많은 의대 공부를 임신한 상태에서 하는 것이 존경스러우면서도, 환경이 그러하니 결혼에 대한 압박을 느끼고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러시아 사회가 여자에게 기대하는 것은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려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여자들이 결혼과 출산 후 일을 계속하기 어렵다고. 이거 왠지 처음 듣는 이야기는 아닌데?


아냐의 본업으로 돌아와 보자. 러시아의 모든 의대생이 우리나라의 공중보건의와 비슷한 수련 기간을 거쳐야 한다. 한국처럼 군 복무를 대신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남녀 모두 보건소나 작은 병원에서 3년을 근무한다. 러시아에서는 만약 전쟁이 났을 때 모든 의대생들은 무조건 참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따로 군대를 갈 필요는 없단다. 보통 남자들은 군대를 가기는 하지만 기간이 1년이고, 소위 명문대에서는 군사학 관련 학점을 몇 개 이수하면 그것으로 군 복무를 대체할 수 있다.


저녁으로는 체인 식당인 마르첼로에 갔고, 나는 파스타를 시켰다. 생선 요리를 고른 아냐는 평소에 내가 먹는 음식이 어떤 것인지를 물어봤다. 보통 밥에 반찬을 주로 먹고, 빵이나 면을 먹기도 한다고 했더니 매 끼니 탄수화물을 먹는데 살이 안 찌는 거냐며 부럽다고 했다. 농담으로 러시아 여자는 집 앞 슈퍼에 갈 때도 풀 메이크업에 하이힐을 신어야 한다면서. 본인도 파스타나 디저트 등을 좋아하지만 살이 찔까 봐 거의 먹지 않는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하루 종일 같이 돌아다니면서 무언가를 먹고 마실 때마다 아냐는 "저건 맛있는데 살쪄서 못 먹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이 현상에 대해 이고리에게도 물어봤었는데, 자기 나름의 생각으로는 안 그래도 전쟁을 치르면서 남자 인구가 많이 줄었는데, 술 담배를 많이 하는 남자들의 평균 수명이 짧기 때문에 여자 인구가 많아진 것이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단다.


내 기억으로는 2014년 정도 해서 러시아 루블화 가치가 폭락했다. 여행에 도움을 주었던 친구가 러시아에 교환학생으로 왔던 2012년 즈음에 비하면 거의 반토막 수준이었다. 당시 한창 친구들이 렌즈를 비롯한 물건을 러시아에서 직구했던 기억도 나고, 이때 러시아에 있던 중국 유학생들의 구매 대행이 확대되었다던 뉴스도 기억난다. 아냐가 유난히 청년 실업과 낮은 임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던 것도, 당장 본인과 주변 친구들에게 닥친 가장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상황을 물어보기에 한국 역시 천국은 아니며, 젊은이들이 한국을 떠나는 움직임도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부분에서 오히려 아냐는 부러워했는데, 러시아에서는 해외로 나가는 것을 또 하나의 선택으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아니기 때문이란다. '우리나라 상황이 이런데 어떡하지.' 하며 낙담해 있는 상태라고. 아냐는 여행도 많이 다니고, 해외도 경험해보고 싶은데 주변의 시선을 무시하기도 쉽지 않고, 환율도 좋지 않아 고민이 많다고 했다.


재미있는 것은 중간중간 아냐가 "참고로 나 화난 거 아니야. 너 얘기 듣고 있는 중이야."라고 본인의 표정을 변호했던 것이다. 러시아식 유머인가 싶어 물어봤더니 스페인 학교를 다니면서 내내 들었던 이야기란다. 본인은 막상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고 있거나, 점심 식사를 생각하고 있는데 주변 친구들이 혹시 화냤나고 매번 물어보더라는 것.


말이 잘 통하는 친구와 모스크바 역에서 만나 바실리예프스키 섬, 페트로 파블롭스키까지 하루 종일 걸으면서 수다를 떨어 즐거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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