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re gonna have girls'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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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대륙을 바꾸어 남아메리카로 간다. 헬싱키에서 마이애미, 그리고 키토로 가는 길. 하지만 핀에어는 나에게 두 시간 연착을 선사했다. 마이애미에서 키토로 가는 비행기를 세 시간 여유를 두고 예약했기 때문에 조금 불안해졌다. 하지만 내가 걱정을 많이 한다고 비행기가 더 빨라질 수는 없으니 편한 자세를 취해 자리를 잡고 영화 감상을 할 준비를 시작했다. 한 여행에서 영화를 일곱 편이나 본 적도 있을 정도로, 비행기에서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한다.
막 영화를 시작하려는데 한 금발의 여자가 "쏘리, 쏘리"라면서 들어와 내 옆자리에 앉는다.
"So we're gonna have girls' night!"
친근하게 건네는 중저음의 말투와 맞지 않는 화난 듯한 무표정. 러시아 사람인가?
과연 그녀는 러시아 예카테린버그 출신이었다. 이름도 도시와 같은 예카테리나. 나보다 네 살이 많고, 고등학교 물리 선생님이라는 까쨔 언니(예카테리나를 줄이면 까쨔가 된다.)는 엄청난 수다쟁이였다. 내가 비행기까지 챙겨 온 Hapankorppu를 먹는 걸 보더니 똑같은 한 상자를 자기 가방에서 꺼내며 마치 '우린 운명이야'라는 눈빛을 보낸다.
"너도 이거 사 왔구나!!! 이게 감자칩 같은 것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난 이거 엄청 맛있더라고!!"
물론 얼굴 표정은 계속 포커페이스다. 이고리가 해 준 말로는 러시아 사람들은 항상 흑빵을 먹는다고 했다. 그 흑빵을 말려서 과자로 만든 이 Hapankorppu가 당연히 맛있을 수밖에 없다.
이미 한국인 친구도 몇몇 있는 까쨔 언니는 한국 나이, Korean age라는 개념이 흥미롭다며 대화를 시작했다. 이렇게 나이를 세는 방식을 한국에서만 사용하는 것도 아닌데 그의 한국 친구들은 영어로 나이를 이야기할 때 항상 international age / korean age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걸 조사해서 사람들이 "my korean age is.."라고 말하는 부분만 편집한 동영상도 있다. 까쨔 언니는 다시 한번만 그 개념에 대해서 천천히 설명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열 시간 비행에 두 시간이 연착됐는데 못할 것은 뭔가. 내친김에 '빠른 생일'까지 설명해주거, 이것 또한 엄격한 규칙은 아니기 때문에 나는 학교를 같이 입학한 친구 중에 빠른 4월생까지도 봤다는 이야기도 했다. 자기 반 학생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며 거의 필기하듯이 메모하면서 듣던 까쨔 언니는 이쯤에서 혼란스러워진 표정이다. 당이 떨어졌는지 내 설명이 다 끝나자 면세점에서 사 온 과일젤리를 꺼내서 같이 먹자고 했다. 색깔만 다르고 99.9% 백설탕 맛임이 틀림없는 그 젤리는 완벽히 내 취향 저격이었고, 이를 눈치챘는지 언니는 남은 젤리 다 너 하라며 줬다. 스바시바!!
그렇게 우리는 긴 수다를 떨었고, 나는 언니의 남자 친구와 그들의 관계에 대해서도 많은 정보를 얻었다. 중간중간에 밥도 먹고, 각자 영화를 보는 시간도 가졌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까쨔 언니가 다급하게 나를 부르며 창문을 보라고 했다. 지금 그린란드가 보인단다. 그린 란드!!!!???
세계지도에서만 보던, 아이슬란드와 이름을 바꿔야 되는 것이 아닌가 했던 그 그린란드가 눈앞에 보인다. 러시아에서 핀란드까지도 처음으로 그렇게 높은 위도까지 올라갔던 것인데 그린란드라니 세상에. 아주 멀리서 본 것이지만, 처음으로 내 두 눈으로 본 그린란드는 정말 멋있었다. 최고다. 연착된 핀에어는 별로였지만 옆자리 짝꿍을 잘 만나 즐거운 비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