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잘해도 더 쪼지 않는 독일 회사

현실적인데?

by mig

분기 실적을 공유하는 회의가 있었다.


우리 회사는 100% 온라인으로, 잘 알려진 브랜드들의 이월 상품을 할인해서 판매하는 소위 아웃렛 판매 채널이다. 백화점이나 가두점 등 오프라인 상점들이 문을 열지 못하던 락다운 기간의 수혜를 톡톡히 본 셈이다. 운이 좋았는지 입사 이후로 계속해서 회사는 성장했고, 예기치 못한 전염병의 여파에도 더 큰 화력을 얻었다.


나갈 곳도 없고, 만날 수 있는 사람도 한 명으로까지 (!) 제한되었던 그 시간 동안 물론 의류업 전체적으로는 수요도, 매출도 곤두박질쳤다. 우리는 아기 및 어린이들을 위한 상품 구성이 거의 절반인데, 역병이 도는 시기에도 아이들은 태어나고 자라니, 이 부분에서는 매출이 꾸준히 일어났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피해 가까운 산으로 호수로 기분 전환을 떠나는 사람들 덕분인지 아웃도어 매출 역시 좋았다.


봄부터 락다운이 계속되었던 2020년과 조금씩 백신 물량도 규제도 풀리고 있는 2021년. 속도는 조금 느려졌지만 여전히 매출은 승승장구하고 있어 분기별 보고인 라이브 스트리밍 화면에서 보이는 사장단의 얼굴에는 미소가 끊이질 않는다.


다시 한번.

성장 속도는 느려졌지만,

여전히 매출은 늘고 있다.


또는,

여전히 매출은 늘고 있지만,

그 속도가 느려졌다.


같은 상황을 다르게 설명해보았다. 이 부분에서 한국에서 일했던 회사와 지금 회사의 차이점을 느꼈기 때문이다. 좋은 운이 두 번이나 작용했던 것인지, 한국에서도 독일에서도 나의 입사 이후로 내가 몸담은 팀의 매출이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두 곳 모두 내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사 역사 이래 최고 매출을 경신했다. 물론 나는 두 곳 모두에 말단 신입으로 입사했기 때문에 이 성과에 나의 기여도는 미미하다.


한국에서 일했던 팀은 회사 포트폴리오 중 성과가 가장 좋았다. 경쟁이 치열한 국내 의류 시장에서 눈에 띄게 규모를 불려 나갔다. 잘하고 있으니 회사 업무 분위기도 좋았다. 그전까지 매출 성장을 담당하던 다른 팀이 부진하기 시작하면서 우리 팀에 거는 기대도 커졌다. 그래서일까, 점점 현실적이라고 하기 어려운 목표치가 위에서 내려왔다. 물론 잘해왔다고 안주하는 분위기도 아니기에 아슬아슬하게 그 목표를 맞추기도 했고, 그러지 못하기도 했다. 이것이 과연 가능한 성장률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몇 번 잘 해왔으니 계속, 지금보다 더욱 잘해야 된다고 했다. 숫자로 세워진 목표가 버거워지다 보니 그 매출을 맞추기 위해 요리조리 머리를 쓰기도 했다.


지금 회사에서, 이번 분기별 보고 내용이 새로웠던 건 바로 한국에서의 경험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 일하고 있는 독일 회사가 유난히 편안한 분위기의 조직이기도 하다. "빠르게 배울 수 있다"나 "열정"같은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보다 편안하고 느린 곳이다. 사장단은 이번 여름부터 규제가 완화되고 오프라인 상점들이 열기 시작했으니, 우리의 성장 둔화는 이미 예견된 것이라는 이야기를 먼저 전했다. 그리고 이 매출 성장 슥도는 더욱 느려질 수 있다고 말하며 이는 거시적인 변화이자 자연스러운 소비자의 행동이기 때문에 우리 측에서는 한계가 있다는 말을 더했다. 여러 KPI 중 목표를 뛰어넘은 부분도, 달성하지 못한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계속 성장을 하고 있고, 회사 내부적으로도 여러 변화를 앞두고 있어 우리의 발전이 기대된다는 보고였다.


가끔은 한국식의 '으쌰 으쌰'가 그리울 때도 있다. 조금 더 열심히, 치열하게 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추가 근무를 절대 하지 않는 동료들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할 때도 있다. 약간의 '파이팅'이 부족한 듯 느껴지는 이 '쪼지 않는' 조직 문화 때문에 한때는 이직을 고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긴 락다운과 재택근무를 거치면서 이렇게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며 일하는 방식이 어쩌면 지속 가능한 방법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독일에서 없이 살아보고 싶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