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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뇽 Jun 18. 2017

12. 파도에도 빈부격차가 있다

서핑 상급 초보, 상초보의 서핑 근황

12-1.  두 발로 선다는 건 인류의 삶을 바꾸는 획기적인 변화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건 서핑에서도 마찬가지다.


https://www.youtube.com/watch?time_continue=1&v=l8o9Aunf6SY


12-2. 요새는 몸으로도 배우지만, 눈으로도 배우고 있다. 유튜브엔 어마어마하게 많은 서핑 영상이 올라와있다. 내가 할 수 없는 많은 영상들.. 어느 정도 보드에 익숙해지면, 보드를 줄여나갈지 키워나갈지를 선택해야 하는데 나는 숏보드보단 롱보드가 더 멋있어 보여서 자꾸 롱보드 영상을 찾아보게 된다.


12-3. 서핑을 하면 할수록, 무릎을 굽힌 정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처음엔 거의 플랭크 자세로 X 쌀 듯 타는 느낌이었는데 이제 거품 파도에선 어느 정도 서서 타는 정도가 된다. 사람들도 좀 잘 피하고, 확확 돌리는 턴을 시도하려고 하는데 그게 꽤나 어렵다. 아직까진 스무스한 턴을 벗어나지 못한 듯.

12-4. 서핑처럼 수평적이고, 서핑처럼 수직적인 운동이 또 없다. 평행한 바다 위를 달려가지만, 바다 위를 달려가는 에너지는 위에서 아래로 부서지는 파도로부터 가지고 온다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움직임인가. 또 그 에너지를 가지고 오기 위해선 수평으로 밀려드는 파도 위를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돌아다녀야 한다. 

12-5. 사실 바다 위를 타고 오는 서핑 자체보다는, 그 서핑을 하는 과정이 힘들다. 무섭게 포효하는 바다 안에 들어서는 것도, 나를 밀어내려는 파도와 맞서 서핑 스폿까지 패들링 해 가는 것도, 적합한 파도를 기다리는 것도. 막상 파도를 잡아타야 할 땐, 아무 생각이 없어지고 자연스럽게 보드가 앞으로 내달리는 걸 느끼며 서게 된달까. 뭐든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서핑만큼 과정이 중요한 건 없다. 서핑은 과정이 없으면 결과를 낼 수조차 없다.

12-6. 오늘은 두 번의 서핑을 위한 한 번의 휴식을 갖는 날이다. 10일 연속 4시간씩 서핑을 하다 보니 왼쪽 갈비뼈가 부러진 듯 당겨왔다. 마지막 파도를 탈 때쯤엔 지금 나가지 못하면 바다에 수장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래서 하루 쉬기로 했다. 서핑 역시 휴식이 중요하다.  그런데 막상 아침에 자연스럽게 일어나 서핑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 나를 발견.. 진짜 서핑하러 가고 싶던 날이었다.


12-7. 이 날은 참 사고가 많았다. 어느새 갓 초보는 아니라고, 자꾸 눈치 없이 부딪히는 초보들에게 눈총을 준다. 한 번은 중국인 남자애가 내가 한참 전부터 타고 온 파도를 갑자기 드랍해서, 내 발목을 보드로 스매시하였다. 얼마나 화가 나던지. 하지만 불과 며칠 전, 나도 누군가에게 저랬던 적이 있지 않을까. 내가 모르던 시기에. 그리고 조금만 더 잘 탔다면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으면서. 물론 한참 후에 든 생각이다. 그 당시엔 화가 화가 어마어마어마하게 났드랬다.

12-8. 서핑하기 충분한 파도가 많이 치는 발리다. 그래서 서퍼들도 여유롭다. 이번 파도 못 잡아도, 다음 파도 잡으면 되니까. 장판 같은 바다에서, 한 파도 잡겠다고 너도나도 패들링을 해야 하는 어디와는 한참 다르다. 바다에도 각자 색깔이 있다. 바닷속에 우리의 삶이 있다. 이것 참, 씁쓸한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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