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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뇽 Aug 12. 2017

우리 모두 택시운전사

[택시운전사]를 보고

- 위로 1cm, 아래로 1cm.


외삼촌의 어깨를 향해 날아온 총알이 얼마나 운이 좋은 자리에 박혔는지 몰러. 그 자리에서 위로 그만큼 올라가거나 내려갔으면 그 자리에서 즉사였다고 하더라. 총을 쏘니까 확성기로 방송하던 여자애를 피하게 하려다 그랬다고, 운이 좋았지야.


눈가가 붉어진 엄마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막 [택시운전사]를 보고 나온 길이었다.

“유리창이 다 깨진 버스가 나주까지 왔었다. 신문에가 글 한 줄 안 나왔어야, 언론 자체를 전두환이가 다 막아브렸어.” 엄마는 말을 이었다.

광주까지 차로 30분, 정말 가까워도 너무 가까운데 모두가 그걸 몰랐다. 나중에서야 공부 잘해 광주로 보낸 자식이 병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 몇몇 집이 뛰쳐나갔을 뿐이었다.  그중 엄마네 집이 있었다. 반남 촌구석까지 어떻게 연락은 닿아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졸도 직전까지 몰고 간 소식. 아들이 병원에 있다는 것이었다. 군인들이 친 바리케이드 때문에 버스가 병원이 있는 광주 중심부까지 못 들어갔다. 기사는 백운동에서 외할아버지를 내려줬댄다. 외할아버지는 장남이 입원한 적십자사 병원까지 걸어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 우연찮게 광주에서 택시운전사.

영화를 보기 전 나는 SNS에 이렇게 한 문장을 썼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앞에서도, 옆에서도, 사람들은 흐느껴 울었다. 광주라서 그런 건지, 다른 곳에서도 이런 건지 알 수는 없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 후, 모두가 숙연하게 영화관을 빠져나왔다. 모두 모르는 사람들인데, 왠지 그들의 마음을 다 아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 홍어 배달 왔어요

한참 일베가 유명해지던 대학교 때, ‘역사란 무엇인가’ 수업을 들었다. 그때같이 밥을 먹었던 사람들 중에 광주 출신 언니와 내가 있었다. 아직도 ‘홍어 배달 왔어요.’라는 게시글이 잊히지 않는다. 자식의 관을 부여잡고 울던 어머니의 사진이었다. 누군가 수많은 민주 항쟁이 있었다,는 문장으로 말을 시작했다. 왜 유독 전라도 사람들은 5.18 민주화 운동에 이렇게 감정적이냐고, 마치 그게 유일한 민주 항쟁인 것처럼 대하냐고 물었었다. 그때,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고 되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 술자리 끝에서 결국 그 언니와 나는 울었다. 그게 5.18 민주화 운동 때문에 흘렸던 마지막 눈물이었다.



-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세상 사람들은 우는 아이의 말을 안 들어줘

서러울수록 카메라를 들어야만 한다. 높이, 넓게 많은 걸 보아야 한다. 영화에서 김사복은 좌절한 힌츠페터에게 카메라를 들라고 한다. 이 사실을 널리 알리라고, 약속했지 않냐고. 회사에서 일하며, 사회를 알아갈수록, 다신 울어선 안되겠다고 다짐했다. 상처가 너무아파 아프다고 말을 하면, 사람들은 다친 애의 투정으로만 내 얘기를 들었다. 아플수록, 그래서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을수록 우린 울어선 안되었다. 힘들다, 아프다, 고통스럽다, 슬프다. 이 모든 말들을 울음소리처럼 삼켜내었다. 그리고 당신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이상하게 보이는 것도, 당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다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냉혹하게도, 가장 감정적일수록 가장 이성적이어야 하는 게 세상이었다.



- “네가 태어나기 전 일인디 아직 끝난 일도 아니여야.”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에, 내가 고통받았던 일도 아닌데, 이게 참 마음에 응어리처럼 아프다. 이상한 일이다. 그런 내 말에 엄마는 말했다.


“지역 공감대지야, 느그 친구들, 갸들의 가족, 우리 가족, 전라도의 그 시대는 구멍이 뚫려있어야. 이상할 것도 없다. 태어나기 전 일인디 아직 끝난 일도 아니여야.”


그래, 엄마 말이 맞다. 근현대사를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가슴에 차오르는 게 억울함이었다. 애초에 광주에서만 기획된 민주화운동이아니었다. 다만 그날, 광주에서만 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뿐이다. 하루 전날인 5월 17일, 신군부는 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을 회의 도중연행하고,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다. 그들의 총칼은 시위가 일어난 광주를 향했다.


왜 광주만 가지고 그래?, 라는 식의 억울함이 아니다. 나는 5.18민주화 운동이 자랑스럽다. 하지만 5.18 민주화운동 이후, 광주는 전라도는 어떻게 되었는가. 북한에서 가장 먼 전라도 사람들은 어떻게 빨갱이, 괴뢰군이 되었는가. 왜 옳은 일을 한 사람들이 옳지 않은대우를 받아야 하는가. 그런 억울함이었다.

분명 5.18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 일인데, 그렇다고 아직 끝난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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