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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뇽 Sep 08. 2017

머리를 잘랐습니다

몸무게가 가벼워진 기분입니다

4년 간 길렀던 머리카락이 천천히 미용실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별 후 머리를 자르러 간다던 사람들의 심정이 이런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머리카락을 잘라낸다는 물리적 행위 뒤에는, 개개인에게 다른 기간의 시간을 쳐낸다는 의미가 담겨 있으니까. 아, 그렇다고 헤어져서 미용실에 온 건 아니었다.


투블럭에서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가 되기까지, 2014년에서 2017년까지, 나는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사람들과 사건들 사이에 있었다. 그리고 다시 비대칭 투블럭으로 돌아온 지금, 그때의 일들은 더 이상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과거가 되어버렸다. 내 몸에서 잘려나간 머리칼이 더 이상 단백질로 이루어진 길쭉한 실,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 것처럼.


아깝지 않아?


단칼에 머리칼을 쳐낸 쿨내 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 어지간히 망설였다. 커트머리를 하고 있는 엄마부터도 아깝지 않냐고 물었더랬다. 길러온 시간을 지켜본 친구들은, 그 관계가 오래될수록 아깝지 않겠냐고 물었다. 나 자신도 그 질문에 답을 못했기에 주저하던 결정이었다.


머리야 어차피 기르면 된다거나 지금 안 하면 언제 하겠냐는 말들로 나를 다독여봐도, 쉬이 마음이 정해지지 않던 찰나에 한 친구가 물었다.


뭐가 아까운 건데?


그 질문에 나는 갑자기 얼어붙었다. 그러게, 나는 무엇이 그토록 아까워서 이렇게 고민을 하는 걸까. 생각은 넥스트 페이지로 향하는 화살표처럼 작은 스위치 하나로 다른 국면을 맞았다.


나는 정리를 시작했다. 우선 머리가 짧아지면 할 수 없는 헤어스타일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건 머리가 길어서 할 수 없는 종류가 있으니 넘어가고. 머리가 짧으면 자주 미용실에 가야 하는데, 머리가 길면 한번 갈 때 쓰는 비용이 크니까 또 타당한 아까움에 해당하지 않았다. 긴 머리를 소유한다는 이유만으로 획득하게 되는 여성성까지 떠올렸을 때 나는 혀를 찼다. 그깟 이유 때문이라면 당장이라도 이 머리를 내놓아 구워 먹으리. 하지만 여전히 나는 제자리였다.


그때 핸드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내게 무엇이 아깝냐고 물었던 친구의 메시지였다.


- 어차피 이건 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야. 며칠을 고민할 것이냐의 문제지


다물어진 입술 틈새로 웃음이 튀어나왔다. 친구의 말이 맞다. 지금 나는 정말 머리를 자를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게 아니다. 나 자신에게 왜 머리를 잘라야만 하는지, 설득하는 과정을 거칠 뿐이다. 나를 설득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 머리를 길러온 시간이다. 시간의 다른 이름은 노력이다.


당연히 아깝지


또다시 아깝지 않겠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대답했다. 세상 누가 자기가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무리 적은 양이라고 하더라도 아깝지 않겠냐고. 그래서 나도 정말 아쉽고 안타깝고 아깝다고. 하지만 나는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 지금 내가 갖고 싶은 것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예전부터 나는 과거는 현재의 발자취일 뿐, 현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해선 안된다고 스스로 다짐해왔다. 한정된 수명을 가진 인간이 살아온 시간에 집착하는 건 당연하지만 하루를 덜 살지언정 집착을 버리고 싶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긴 머리에 매달리고 있는 자신을 깨닫는 순간, 나는 미용실에 전화를 걸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온 순간부터 나는 머리를 하루빨리 자르지 않는 스스로를 견딜 수 없었다.


한 움큼의 머리가 한 줌의 머리가 되었다.

사라진 머리칼만큼, 마음이 가볍다.

머리는 아주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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