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막 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뇽 May 10. 2018

옆으로 걷는다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않고.

초등학생 때, 스스로를 초인이라 생각하던 때에, 눈을 감고 달리는 차에 뛰어든 적이 있었다. 매일 내가 가진 초능력이 무엇인지 실험해보던 시절이었다. 태권도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눈을 감은 채 걸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 비틀비틀거리다 내 몸은 차도로 향했고, 티코는 선을 넘은 나를 공중에 띄웠다. 아주 천천히 도는 세상 속에서 나는 중얼거렸다.

아, 내겐 눈을 감고 걸을 수 있는
초능력이 없구나.


이후에도 수십 번 초능력을 찾는 일을 반복했다. 자질구레한 사고들이 반복됐다. 무르팍이 깨지고, 턱이 찢어지는 일 따윈 대수롭지 않을 만큼 피투성이의 유년기였다. 평범한 스스로를 특별한 무언가로 여기는 오류에서 시작된 에러였다.



하지만 스스로를 특별하게 여기는 습관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다. 더 이상 몸을 가지고 무언가 시험하진 않았지만, 여전히 마음속엔 선택받은 인간이라는 믿음이 타올랐다. 앞으로 더 나아갈 거라고, 무조건 나는 발전할 거라고, 누구든지 다 이길 수 있다고, 남들을 뛰어넘는 좋은 인간이라고. 나치급 최면을 자신에게 걸면서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며 우악스럽게 살아온 시기였다. 그런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바로 자기모순과 자기비하로 깊게 물든 우울이었다. 더 이상 몸이 다치진 않았지만, 마음에서 피가 흘렀다. 그 때야 나는 스스로를 특별하게 여기는 걸 관둘 수 있었다.


눈을 감고 걸을 수도, 숨을 쉬지 않고 살 수도, 말을 하지 않고 견딜 수도 없는 나약한 존재. 뒤돌아서면 다른 말을 하고, 앞담화든 뒷담화든 타인의 욕을 하고, 화목만큼 갈등도 좋아하는 비열한 인간. 내 의지로 산다기보다는, 죽을 용기가 없으니 삶을 계속하는 겁쟁이. 온갖 날 것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나의 가장 연약한 부분에 뭉뚝한 바늘을 찔러 넣는 것처럼 짓눌리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세상 앞에 섰을 때, 처음으로 세상 앞에 서는 게 무서워졌다. 감히 앞으로 나아간다 자부할 수 없는데, 남들 앞에 서서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콘텐츠를 만들 자격이 있을까. 끝없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해가며, 꼬박 밤을 새우다 동 틀 무렵 지쳐 잠들던 시간.


그때 처음으로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궁금해졌다. 수십억, 수백억의 레퍼런스들이, 또 다른 나들이 살아왔던 지구 아닌가. 지금은 혁신이라고 이름 붙인 사람들의 시작, 과감한 도전이었다고 평가받는 순간들의 이유. 나의 삶에 있었던 혁신과 도전과 기적의 접점.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변화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기도
옆으로 걷는 것이기도 하구나


지금 당장 모든 삶을 변화시키는 거대한 흐름만 변화가 아니라는 걸. 하나의 작은 돌부리가 앞으로 인류의 발을 걸어 넘어트릴 수 있다는 걸. 그때부터 가끔 앞으로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옆으로 걷자고 스스로를 토닥이곤 한다.


다만 무엇이든 씀으로써 별생각 없이 미끄러지는 일상에 불편한 감각 몇이 돋아나길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않고 옆으로 걷는 것.

그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우리 모두는 전진하고 있으니.





매거진의 이전글 능력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