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막 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뇽 Nov 29. 2016

술 없이 잘 산다

알콜중독자의 일기


술을 마시지 않은 지 4주 째다.


퇴근 시간, 회사 등받이에서 몸을 떼자마자 생각났던 맥주 한 잔이 사라졌다. 분명 꿀꺽 꿀꺽 꿀꺽 꿀꺽 네번이면 숨 한 번 쉬지 않고 맥주  500cc를 들이켰는데, 언제 그렇게 한 잔을 해치웠는지 기억이 희미하다. 하루가 힘들수록 지글지글 기름 튀는 삼겹살, 소대창에 소주 한 잔이 생각났는데, 이제는 그것도 과거의 일이다. 한 때 입을 열면 술술 거렸던 나는 이제 술 없이 잘 살고 있다.


술 대신 글이 늘었다.


이제는 쓰고 싶은 글 생각이 난다. 오늘은 쓰고 싶은 이야기가 여럿이었다. 자신이 프로라고 생각하는 아마추어, 아는 게 독이 되는 세상, 세상에서 가장 좋은 관계, 떠오르는 여러 글감 중에 오늘은 그냥 술 한 잔 없는 내 삶에 대해 써내려 가기로 했다. 이 글 제목을 뭘로 정할 진 모르겠다. 항상 제목은 마지막에 정하는데 처음부터 제목을 정하면 그 뒤에 이어지는 문장이 의무처럼 느껴져 글을 완성하지 못한다. 주욱 써내려 가다 보면 어느새 글이 끝나갈 즈음 좋은 제목이 툭 나오겠지. 언제나 그랬듯이.

술 대신 늘어난 건 또 있다.


매일 빠짐없이 운동을 시작했다. 기상시간이 다섯시 반이 됐다. 한창 술을 마시던 때엔 아침해와 함께 집에 들어왔는데 이제 아침해가 뜨기 전에 집을 나선다. 보통 아침 여섯시 반부터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데, 가끔 늦잠을 자면 저녁에 운동을 간다. 예전엔 술을 마시면 머리 깨질 듯 많던 생각을 잊을 수 있었는데 요새는 운동으로 생각을 줄인다. 운동을 할 땐 주로 '힘들다.', '언제 끝나지?', '그만할까?', 같은 단편적인 느낌만 남는다. 그래서 자꾸 운동을 가게 된다. 이래서 저렇고, 저래서 이렇고,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것 없이, 간단명료해서. 헬스장 바깥엔 나말고 너무 많은 남이 있어서 도무지 단순해질 수가 없다. 운동할 땐 오직 나만 있다. 내가 그만하고 내가 계속한다. 그런데 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도착한 순간부터는 온갖 것들이 내 삶 속에 쳐들어온다. 도무지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술을 마시지 않으니 좋은 점 하나 더, 고양이들이 나를 반긴다. 내겐 남들은 모르는 주사가 있다. 술 취한 채 집에 들어오면 고양이 둘 중에 아무나 붙잡고 후 술냄새를 맡게 한다. 어릴 적 아빠가 하던 짓을 내가 똑같이 하고 있다. 사람이나 고양이나 남 술 냄새 싫어하는 건 똑같아서, 어린 내가 그랬듯이 고양이들은 질색팔색하며 내 얼굴을 양 발로 힘껏 밀어낸다. 하지만 나는 술에 취하면 힘이 더 세져서 고양이들을 제압하고 더 강하게 숨을 내쉰다. 그런데 이제 술을 마시지 않으니, 제 때 집에 들어오니, 자신들을 괴롭히지 않으니, 밥을 주니, 고양이들이 나를 반긴다.

그렇게 한 때 술 없이 어떻게 살지

진지하게 고민했던 알콜중독자는 술 없이 잘 산다.


 가끔 친구들의 슬픔을 위로해줄 수 없고, 동료들의 기쁨을 함께할 수 없어 마음이 아프다. 그런데 되려 술 없는 일상이 나의 슬픔을 위로하고, 나의 기쁨을 함께한다. 내가 있어야 남이 보이니까, 내가 없고 남만 보다보면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어진다. 그렇게 한 때의 알콜중독자는 술을 마시지 않게 됐다.


술 없는 삶이 꽤 마음에 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친구로 지내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