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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뇽 Mar 03. 2017

익숙해지는 것

모든 처음이 그리워 슬픔

아침에 일어나 어제 벗어놓은 셔츠를 그대로 청바지에 구겨 넣었다. 대충 신발을 구겨신고 집을 나섰다. 똑같은 아침, 집 앞 미용실 아주머니와는 매일 눈이 마주치지만 서로를 응시할 뿐 고개를 끄덕이지도 눈인사를 하지도 않는다. 어제와는 다른 외투를 걸쳤지만, 다를 것 없는 알맹이로 골목길을 가로질렀다. 파란 153 버스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내 앞을 스쳐 지나가고, 사람들의 바쁜 옷깃이 몸에 부딪힌다. 어제 와는 다른 사람들 속에서 어제 와는 다른 공기를 마시지만, 하잘 것 없이 같은 알맹이로 나는 쓸려갔다.


다른 알맹이들 사이에 끼여 간신히 버스 창가에 기대섰다. 내 앞엔 대머리 아저씨가 공손하게 모은 손으로 서류가방을 잡고 있다. 자꾸 아저씨의 번들번들한 정수리에 시선이 갔다. 몇 가닥의 검정 머리카락만이 남아 한 때 이 곳에 우거졌던 아저씨의 머리숱을 그려보게 만든다. 그때와 지금, 이 사람은 무엇이 달라졌을까. 이 사람도 그렇고 그런 알맹이일까. 각자의 아침, 다를 것 없는 알맹이를 욱여넣고, 또 이 버스에 욱여넣어진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문득 슬퍼졌다.


아저씨의 머리 너머로 자주 가던 화덕피자집이 보인다. 간판이 떼인 가게 창문엔 임대 문의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있다. 창 너머엔 회색 먼지 뭉치가 굴러다니고 한편엔 가구들이 테트리스처럼 쌓여있다. 어제까지 잘 하던 가게가 없어지는 건 익숙한 일이건만, 나는 항상 그 익숙함을 서러워했다. 왜 모든 건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걸까. 처음 먹을 때 너무 맛있어, 자꾸만 찾게 되던 곳이었다. 지금은 언제부터 가지 않게 된 건지 희미했다. 나도 모르게 익숙해진 스스로가 원망스러워 눈가에 매운기가 돌았다. 


 생각해보니 모든 하루가 익숙해진 것들의 연속이다. 분명 엄마의 다리 밑에서 처음 숨을 들이쉴 때, 폐세포를 저미는 고통에 울음을 토해냈는데, 이가 나는 간지러움에 잇몸을 씹어대곤 했었는데, 공깃밥 뚜껑이 뜨거워 손을 흔들어대곤 했었는데. 이제는 익숙한 일들이 뻔하게 벌어지고, 뻔하게 흘러간다. 


하차벨 소리가 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버스가 멈춰 섰다. 알맹이들이 길바닥에 쏟아졌다. 길을 찾는 이도, 주위를 둘러보는 이도 없다. 그저 각자의 길로, 익숙한 방향과 익숙한 패턴으로 발을 옮길 뿐이다. 그 사이에서 나는 우두커니 멈춰 섰다. 저들 사이에 내가 있다. 왜 마시게 됐는지 기억나지도 않는 아메리카노를 손에 쥐고, 2번 출구를 향해 미끄러지듯 내려가는 내가,  이제는 사는 게 익숙해져 간지럽지도, 아프지도, 설레지도 않는 내가 있다. 


슬프다. 

처음이라 고통스러웠지만 소중했고, 

그래서 기억할 수 있었던 모든 순간들을 

이제는 잃어버렸다. 

사는 게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내가 어쩔 수 없어 슬픈데, 

정말 어쩔 수 없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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