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프랑스를 비롯한 해외에서는 두루마리 휴지를 화장실 밖으로 잘 갖고 나오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두루마리 휴지를 화장지가 없을 때는 그 대용으로도 사용했었다. 왜냐면 난 한국사람이니까 ㅎㅎ
물론 프랑스에서는 나도 화장실용 휴지 따로 , 화장지 따로 사용하고 있다.
요즘은 한국도 휴지를 용도별로 사용하는 것 같은데,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화장지도 사용하긴 했지만 두루마리 휴지가 식탁에 있는 모습은 우리 집에서도, 친구 집에서도, 길거리 떡볶이집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프리카 우리 집 식탁 위에 화장실용 휴지가 놓여있는 것에 나는 비위생적이라거나 휴지가 펄프의 화학공정으로 인해 입을 닦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등등.. 휴지에 관한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왜냐면 내게는 흔한 모습이었고, 익숙했으니까...
가봉 정부에서 내어 준 집에는 거실에 커다란 12인용 식탁이 있었는데, 식탁 밑에는 두꺼운 카펫이 깔려 있어서 관리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꼬마 손님들이 과자 부스러기나 음료수 등을 카펫에 흘리면 바로 치워야 했다. 아프리카에서는 집안에 항상 약을 치고 정기적으로 관리를 해도 개미나 쥐, 바퀴벌레를 완전히 막지는 못한다. 그래서 이런 과자 부스러기들을 그냥 놔두면 개미 같은 불청객들이 몰려오기 때문에 그때그때 바로 청소해야 하는데, 급할 땐 청소기 가지러 가기보다는 가까이에 있는 식탁 화장지에 먼저 손이 가게 된다. 물가가 비싼 그곳에서 화장지 한 장도 아까웠던 나는 아무래도 좀 더 저렴한 두루마리 화장지를 갖다 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식탁에 두루마리 휴지를 갖다 놓기만 하면 자꾸 없어지는 거다. 벌써 세 번째였다.
아이들에게도 남편에게도 물어봤지만 아무도 치우지 않았다고 한다. 집안일을 도와주는 파트리샤에게 물어봤더니 자기가 치웠다며 화장실에 갖다 놓았다고 했다.
이유는 그 휴지는 화장실용이니까…
그러면서 주방 수납장에 천으로 된 세르비에뜨(serviette 냅킨)가 있으니 필요하면 그걸 다려놓겠다고 했다.
그래서 난 식사 때 필요한 게 아니라 아이들이 식탁 밑으로 떨어뜨리는 이런저런 것들을 치우기 위해서 쓰는 거니까 다음에는 휴지를 치우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내 말에 파트리샤의 큰 눈이 더욱 커지면서 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결국 별말 없이 알겠다고 하였다.
그 후로 식탁 위 휴지가 사라지지는 않았는데, 이번에는 두루마리 휴지가 내가 원래 놓아둔 식탁이 아닌 식탁 뒤 콘솔 위로 자꾸 위치가 바뀌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파트리샤가 또 그러는 것 같았다. 내가 식탁 위에 올려놓은 휴지를 콘솔 위로 치워 놓고, 또 내가 다시 식탁 위에 놓으면 또 콘솔 위에 갖다 놓고,,,,
왜 휴지를 자꾸 콘솔 위에 놓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두루마리 화장지는 화장실 용이라 식탁 위에 있으면 보기가 거북해서 치웠다고 했다.
화장실에서 사용한 것도 아닌 새 거인데,,,
아무래도 내 말을 잘 이해 못 한 것 같아서 내가 두루마리 화장지를 식탁에 갖다 놓게 된 이유에 대해서 재차 설명해 주고 치우지 말라고 이번에는 '당부'하였다. 파트리샤는 이번에도 알았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며칠 후 남편 김 차장이 VIP 수행을 위해 해외로 출장을 떠났다.
나는 감기로 며칠 고생을 했는데 몸이 안 좋아 시장도 못 보고, 남편도 없이 그렇게 며칠을 보내다 보니 생필품들이 이것저것 떨어진 게 많아졌다. 그중에는 화장지도 있었다.
그래서 화장실에 쌓아 두었던 새 두루마리 휴지를 갖고 와서 그걸로 코를 풀었다. 화장실 수납장에 있던 거였고 새것이었다. 화장실에서 사용했던 게 아닌 새것...!!
사실... 원래는 청소용으로 쓰려고 갖다 놓았던 것을 습관이라는 게 무섭다고 나도 모르게 휴지를 자꾸 쓰게 되었다. 화장지가 없을 때는 식사 후에도 사용하게 되었고 , 식탁 위에 떨어진 반찬이나 국물 같은 것도 휴지로 닦았다. 두루마리 휴지를 식탁에서 아주 다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D
그날도 별생각 없이, 시럽으로 된 기침약을 먹다가 좀 흘려서 휴지를 뜯어 입 주위도 닦고 옷에 흘린 곳도 좀 닦고,,, 식탁 위에도 닦았다. 주방으로 들어가려던 파트리샤가 이런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놀란 표정의 그녀가 입모양으로 오 몽듀! oh mon dieu(oh my god!) 하였고 난 왠지 그녀에게 뭔가를 들킨듯한? 기분이었다.
프랑스나 해외 여러 나라에서는 화장실용 휴지는 볼일 보는데만 사용하는 것으로 인식이 되어 있고 이걸로 식사 후에 입을 닦는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가봉은 오랫동안 프랑스령에 있었던 나라라 이들의 사고방식은 거의 프랑스에 가깝다. 프랑스의 화장지는 용도별로 세분화되어 있다. 두루마리 휴지(le papier toilette)는 화장실 용, 화장지는 무슈와 mouchoir 라 해서 코를 푸는 용이다. 우리는 이것으로 얼굴 화장을 지울 때 많이 사용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코를 푸는 용으로 더 많이 쓰이고 얼굴용은 꼬똥 마끼야쥬 coton maquillage 라 불리는 면 화장솜을 쓴다. 그리고 식탁에서 사용되는 세르비에뜨(serviette 냅킨)는 식사 중이나 후에 입을 닦는 용으로 사용된다. 아마 영어권의 다른 아프리카 나라도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이렇게 휴지 하나도 용도별로 다르게 사용되고 있는 프랑스 생활 방식이 그대로 정착된 이곳에서 파트리샤가 나의 두루마리 휴지 사용에 대해 놀란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프랑스식 교육이나 문화에 익숙한 그녀의 눈에 나의 행동은 어쩌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어쨌든 그들과 나 한국사람과의 생각과 문화 차이이니 설명을 해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파트리샤에게 그들과 다른 한국사람들의 '휴지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내 주관적인 생각일 수 있겠으나...) 우리는 지금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쓰고는 있지만, 예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휴지를 다양하게? 사용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습관이 베인 나는 식탁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은 없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당신들처럼 ‘화장실용 휴지’ le papier toilette로 분류해서 부르기보다는 그냥 ‘휴지’로 부르기 때문에 전에는 일반적으로 사용용도가 화장실에만 국한된 것으로 인식이 되어 있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제야 파트리샤는 알았다고, 이해할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며칠 후 역시 대답뿐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후로 파트리샤는 더 이상 나의 '두루마리 휴지'를 건드리지? 않았는데 , 그 대신 어느 날 주방 티슈를 슬쩍 식탁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맙소사!!! 파트리샤 <<<< :D
파트리샤와 나의 두루마리 휴지 신경전은 그녀가 계약 만료로 우리 집을 떠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그녀 눈에는 밥 먹는 식탁에서 화장실 용 휴지를 사용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것이었나 보다. 만약 아프리카가 아닌 한국이었다면 그녀는 좀 더 적응하기 쉬웠을까?
서로의 다양성-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건 의외로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