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와인이라는 '뱅쇼' vin chaud는 파리지앙 발음으로는 '방쇼'이므로 본문에서는 '방쇼'라고 표기하겠습니다.
프랑스 파리에도 겨울이 왔다. 어릴 때부터 추위도 잘 타고 기관지가 약한 나는 겨울에는 늘 감기를 달고 산다. 올해도 예외는 없다는 듯이 감기, 아니 감기보다 더 독한 녀석들이 찾아왔다. 지금 프랑스 전역에 유행 중인 세기관지염과 독감에 걸려버린 것이다. 콧물에 기침에 몸살처럼 온몸이 아파왔고 식욕도 떨어졌다. 열이 오르는지 몸을 덜덜 떨고 있는 내게 남편이 방쇼 한잔 마셔보라며 데워다 주었다. 따뜻한 머그잔에서 올라오는 향긋한 냄새가 기분을 좋게 해 주었다.
방쇼는 이미 초기 증상을 지난 독한 감기에는 별 효과가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남편의 마음을 생각해서 마시기로 했다. 솔직히 감기에는 엄마표 감귤차가 최고인데...(아픈 나를 대신해서 집안일을 며칠째 하고 있는 남편한테 감귤차가 마시고 싶다는 말은 차마 못하고) 파리에서 겨울을 맞을 때마다 방쇼를 마시는 날이면 나는 어릴 적 거실 난로 위 주전자에 끓고 있는 엄마의 감귤차가 생각난다.
방쇼의 향긋한 향이 정향이나 계피 등의 여러 가지 향신료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나오는 것이지만 나에게는 여기에 들어간 시트러스 계열의 상큼한 과일향이 유난히 강하게 와닿는다. 그리고 그것은 어릴 적 마셨던 감귤차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 향에 취해서일까, 아직 남아있는 와인의 알코올 기운이 들어가서일까, 겨우 몇 모금에 몸이 나른해지고 눈이 저절로 감기는 기분이 들었다.
방쇼와 크리스마스
겨울이 오면 파리는 온 도시가 멋진 크리스마스 조명과 불빛으로 물든다. 화려한 드레스로 갈아입은, 반짝반짝 빛나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파리의 모습은 모든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몇 년 동안 계속되던 파리 샹젤리제 거리의 붉은 조명이 사라지고 다시 예전의 황금빛 물결을 담은 크리스마스 일루미네이션이 돌아왔다.
12월이 되면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전역에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고, 거리 곳곳에 크리스마스 조명이 설치된다. 이런 파리의 모습을 보면 나 역시 괜히 설레고 빨리 크리스마스가 왔으면 좋겠다는 아이 같은 생각에 빠져버린다. 코로나로 인해 작년에는 봉쇄령이니 거리두기니 해서 제대로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지 않아 그런지 올해는 더욱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고 한다.
내가 봤던 크리스마스 마켓 중 단연 최고는 바로 스트라스부르 Strasbourg와 콜마르 Colmar이다. 크리스마스 캐피털이라 불릴 정도로 역사와 전통이 오래된 스트라스부르와 장인들의 예술작품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콜마르의 노엘 시장은 추운 날씨와 많은 인파 속에서 느끼는 피곤함도 잊은 채 그냥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흠뻑 빠져들 수 있는 곳이다.
12월에 파리를 방문하는 지인들에게 시간을 내서 꼭 한번 다녀오라고 추천하는 곳이기도 하다. 대표 먹거리인 프레즐이나 소시지, 빵 데피스등 입을 즐겁게 하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특히 여기 마흐쉐 드 노엘(Les marchés de Noël,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뭐니 뭐니 해도 꼭 맛봐야 할 것은 바로 글루바인이다. 글루바인은 독일어(Gluhwein)로 방쇼와 같은 따뜻한 와인이라는 뜻이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려오는 눈 오는 밤 추운 몸을 따뜻하게 녹여주는데 최고이고, 글루바인이 품은 향기는 그곳을 떠난 후에도 다시 생각날 만큼 매우 특별하다.
위 사진들은 코로나가 전 세계를 뒤덮기 바로 직전인 2019년 12월에 파리 튈르리 정원에서 열렸던 크리스마스 마켓 모습이다. 이때만 해도 코로나로 인해 많은 변화가 생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은 상상도 못 했으니... 사람들도 엄청 붐볐고 모두 즐겁고 행복한 모습들이었다. 많은 인파들 틈에 끼여 방쇼 한잔 맛보려고 긴 줄을 오랜 시간 참아가며 기다렸던 생각이 난다.
홈메이드로 다양한 재료를 가지고 더 고급지게 만들 수 있지만 방쇼는 집에서 마시는 것보다는 추위에 꽁꽁 얼어붙은 몸으로 뜨거운 와인을 호호 불어가며 마셔야 제대로 된 맛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이번 감기가 나으면 에펠탑 샹드마르스에 열리는 크리스마스 마켓에 가 볼 생각이다.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조명등이 켜진 에펠탑 아래에서 마시는 따뜻한 와인 역시 낭만적일 것 같다.
몽블랑에서 만난 나의 인생 방쇼
인생 방쇼라고 느낄 만큼 잊을 수 없는 맛을 느꼈던 것은 바로 몽블랑 샤모니에서였다.
실력도 없었지만, 한국과 전혀 다른 생 자연 그대로인 그곳 스키장에서 넘어지고 엎어지고,,,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한나절을 그렇게 보내고 내려와서 마시는 방쇼 한 잔에 이제 살았다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따뜻한 열기가 온몸으로 퍼졌고 와인의 쌉싸름한 맛이 첫 번째로 혀끝에 들어오면서 향긋한 오렌지와 계피향이 입안 가득 차올랐다.
오~ 방쇼가 이런 맛이었어?
이제껏 파리의 노엘 마켓에서 먹어봤던 맛과는 조금 더 깊고 조금 더 달콤 향긋한 그 맛에 드디어 인생방쇼를 찾았다며 한잔에서 두 잔, 두 잔에서 석 잔으로 넘어가며 결국 그날 밤은 몸살에 머리까지 아파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동안 파리에서는 맛볼 수 없는 방쇼의 깊은 맛을 찾아낸 것으로 만족하였다.
어쩌면 거기서 거기일 방쇼맛을 특별하게 느꼈던 것은 마시는 그 순간의 분위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추운 겨울 날씨,
하얀 눈, 샬레 chalet,
크리스마스트리,
좋은 사람들과의 즐거운 시간,
시트러스 향기,
어릴적 엄마가 만들어 주시던 감귤차처럼 한 잔 마시면 추위로 떨리던 몸이 바로 풀리는 것 같은 그 느낌까지...
방쇼를 마실 때마다 나를 감싸는 따뜻한 아트모스피어(atmosphere)는 어릴 적 기억 저편에 아직도 반으로 접혀있는 그리운 순간들과 묘하게 닮아있다.
난로 위 주전자에 담긴 엄마의 감귤차
그해 겨울, 서울은 영하의 날씨가 계속되었다. 아직 방학을 하기 전이었고 감기에 걸려 힘들어하는 나를 위해 엄마가 감귤차를 끓여 놓으셨다며 거실 가운데 놓인 난로 위 주전자에서 감귤차를 컵에 따라 꿀을 타서 주셨다. 언제부터인가 겨울만 되면 엄마는 늘 끓이시던 보리차 대신 감기로 고생하는 나를 위해 감귤을 가득 담은 주전자를 난로 위에 올려놓으셨다. 요즘은 청을 만들어 뜨거운 물에 타마시는 것이 유행이지만 엄마표 감귤차는 하루 마실 정도의 양만큼의 슬라이스로 자른 귤들을 물과 함께 주전자에 담아 난로에서 뭉근하게 보글보글 끓이셨다.
마치 센 불에서 끓이면 안 되는 방쇼처럼…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거실문을 열면 따뜻한 온기와 함께 코 끝을 찌르는 향긋한 귤향이 나를 반겼다. 자칫 잘못하면 입을 데일 정도로 뜨거운 차를 호호 불어가며 마시면서 추위에 얼은 몸을 녹였다. 엄마가 그런 나를 보시고 계속 그렇게 감기가 낫지 않아 힘들어서 어떡하냐고 말씀하시며 안쓰러운 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엄마의 부드러운 손길에 나는 아기 고양이가 된 듯, 이제 다 나았다며 애교를 피웠다.
남편이 가져다준 방쇼를 거의 다 마셨다. 방쇼와 함께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며, 그리운 엄마의 따뜻한 감귤차를 오랜만에 맛본 기분이었다.
겨울만 되면 내게 찾아오는 감기처럼, 엄마의 감귤차에 대한 기억이 나를 찾아온다. 방쇼가 대신할 수 없는 그 향긋한 기억을 아이러니하게도 방쇼를 마실 때마다 떠올리고 있으니… 아마도 그동안 누르고 있던 나의 정서적 공허함을 방쇼로 대신 채우고 있나 보다.
누구나 자신만의 기억의 창고 안에 담아둔 어릴 적 추억의 시그니처가 있을 것이다.
어느 순간이나 장소에 오면 자신만의 기억창고에서 자동으로 소환되어 딱 떠오르는 그것.
그 기억이 어른이 된 지금도 그리운 이유는 나의 가장 행복하고 특별한 순간이 담겨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파리에 겨울이 오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 즈음, 따뜻한 방쇼를 마실 때마다 늘 생각나는 엄마의 감귤차는 나만의 ‘추억의 시그니처’이다
이제는 더 이상 맛볼 수 없는 엄마표 감귤차이지만 방쇼를 마시는 날이면 따뜻하고 상큼했던 엄마의 감귤차가 추억으로 소환되어 한 동안 그렇게 내 곁에 머물다 간다.
image 1~5 출처 france yah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