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작가에겐 ‘악마의 눈’이 필요하다
“너는 글이 너무 착해.”
드라마 작가 교육을 받던 시절, 선생님이 내게 했던 말이다.
그 당시엔 이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생각하는 착하다는 말은 대체로 칭찬의 의미였다. 모난 데 없고, 누구도 상처 주지 않고, 좋은 사람을 뜻하는 말이니까. 누군가 나에게 너는 착하다는 말을 했다면 나름 뿌듯했을 것이다. 적어도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지는 않았다는 의미 같아서.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착하다는 말을 듣고 처음으로 기분이 나빴다. 내 글을 본 선생님의 표정에는 실망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착하기만 하고 재미가 없다.”
그 말을 듣고 집에 돌아와 한참을 생각했다. 나는 왜 그 말이 그렇게 억울했을까.
나는 배운 대로 썼을 뿐인데...
주인공에게 어떤 사건이 발생하고, 갈등을 겪고, 그걸 극복해 나가며 결국 성장하는 이야기.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이야기에서 놓친 것들이 많았다.
주인공을 비롯해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다 이해가 되는 사람들이었다.
전부 인간적이고, 배려심이 넘치고, 착한 사람들.
그렇다. 나는 ‘좋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그런 글들이 세상을 이롭게 만들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그 누구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착한 글은 무해하다.
누구도 다치지 않는다.
읽고 나서 불편하지도 않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금방 잊힌다.
갈등이 깊어지기 직전에 멈추고, 인물의 비열함을 마주하기 직전에 고개를 돌린다.
마지막에는 결국, 서로를 이해하는 결말로 수습한다.
나는 그 지점에서 항상 멈췄다.
더 들어가면 누군가를 상처 입힐 것 같아서.
아니, 어쩌면 나 자신이 드러날 것 같아서.
얼마 전 스레드에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다.
작가가 착해 빠져서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글을 쓰기 어렵다.
악마 같은 근성으로
남들과 다른 디테일을 끌어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악마 같은 근성’은 잔혹함이 아니다. 냉소도 아니다.
남들과 다르게, 깊숙이 보는 눈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슬펐다’고 쓰는 대신, 슬픔 속에 섞여 있는 질투를 인정하는 것.
‘사랑했다’고 쓰는 대신, 사랑 안에 숨어 있는 소유욕을 드러내는 것.
우리는 그 지점을 자주 지워버리는 실수를 한다.
나 역시 그랬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 미움받지 않기를 바랐고, 괜히 적나라하게 썼다가 오해받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항상 한 걸음 물러섰다. 글은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밋밋했다.
선생님이 말한 ‘착하다’는 어쩌면 평면적인 이야기를 가리키는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의미를 이해하고 인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그동안 좋은 문장, 멋진 문장을 쓰는 데 집중했지, 사람의 진짜 마음을 끝까지 따라가지는 못했다.
불편해질까 봐. 지나치게 솔직해질까 봐.
하지만 글을 쓴다는 건 결국 제3의 눈을 가지고 보는 일이다.
보지 않으려 했던 감정까지 끝까지 바라보는 일.
그래서 작가에게는 조금은 ‘악마의 눈’이 필요하다.
상처를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외면하지 않기 위해서.
요즘 나는 글을 쓰면서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지금 나는 인물을 봐주고 있는 건 아닐까.
독자를 지나치게 설득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정말로 내가 보는 것이 제대로 본 것이 맞을까.
물론 나는 여전히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그 방식까지 착해 빠질 필요는 없다는 걸 조금씩 깨닫고 있다.
앎은 때로 날카롭고, 아름다움은 때로 불편하다.
그리고 글을 쓴다는 건 그 불편함을 피해 가지 않는 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