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고 (宣告)
나선형 계단을 오른다.
청사 안이 무척 고요하다. 이른 아침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어쩐지 위엄과 권위가 느껴지는 공간에서 검색대를 무사히 통과한다.
전시관 문이 열리고 관람 예약 시간보다 좀 일찍 입장을 허락받는다. 관람 시간은 한 시간뿐이어서 빠릿빠릿하게 둘러봐야 하는데 십 분을 벌었다.
관람 시작 전에 어린이 활동지 작성을 권유받는다. 들여다보니 난이도도 꽤 있고 재미있을 것 같아 호기롭게 활동지와 연필을 받아 든다. 작성을 마치면 법원행정처에서 발행한 법과 법원, 재판 이야기와 관련된 책자들을 받을 수 있다.
본격적으로 전시관 관람을 시작한다. 법이라는 글자의 한자 풀이부터 법의 역사, 사법 제도, 연혁, 양형 체험 프로그램, 법과 젠더 특별 전시, 어린이 체험실까지 두루 본다. 무척 알찬 공간이어서 한 시간이 모자라다. 어린이 체험실 안에 마련된 동화와 법 이야기 영상에 빠져들었지만 백설 공주 이야기만으로 만족한다.
제대로 더 꼼꼼히 보고 싶지만 시간이 다 되어 관람을 마무리한다. 한 시간은 무척 길지만 지금은 짧기 그지없다. 역시 뭐든 상대적인 걸까.
그리고 ‘무난하게’ 활동지를 성공한 기념으로 두껍고 무거운 책 몇 권을 받아 든다.
너란 문제를 푸는 느낌으로 활동지에 임했다. 너도 ‘무난하면’ 좋을 텐데.
카페에 앉아 기념으로 받은 책을 읽기 시작한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상상에 빠져든다.
<나홀로소송>, 내 멋대로, 제멋대로 시작된 가상의 소송과 법 적용을 멈출 수가 없다.
법원전시관에 다녀온 것이 무색하다.
‘나홀로소송’은 전혀 이런 뜻이 아닌데. 전자소송 서비스, 최첨단 정보화 법 시스템은 이렇게 내 머릿속에서 재정의된다.
전시관에서 챙겨 온 판결문 요지에서 때마침 이런 문구도 발견한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경험칙에 비추어 모든 증거를 종합적으로 볼 때 어떤 사실이 있었다는 점을 시인할 수 있는 고도의 개연성을 증명하는 것이면 충분하다’.
나는 너를 여행하고 있으므로 모든 사항에 네가 적용된다는 사정에서 내 상상은 고도의 개연성이 있다.
너에 대한 생각이 온통 내 일상을 지배하고 있으니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할 수 있도록 사회보장법이 이야기된다.
그리고 취약계층의 보호에 관한 법률과 성년후견제도에 대해 다룬다. 너에게 제대로 된 의사전달을 충분히 하지 못하는 취약계층으로 나를 분류한다. 직접 표현의 역량이나 능력이 한없이 부족하다는 판단을 내린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죄로 형사재판도 같이 진행된다. 왜 머뭇거리는가. 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가. 왜 스스로의 마음에 상해를 입히는가.
재판의 형식은 국민참여재판이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배심원이 될 테니까.
재판관은 해태가 임명된다. 해태는 법과 재판의 상징물이며 불을 끄거나 화재를 예방한다. 이 재판은 가슴에 불난 것을 끄고 앞으로의 화재도 방지하기 위함이니 해태의 임명은 퍽 마음에 든다.
증인 제시에서는 꽤 애를 먹는다. 떠벌리지 않은 짝사랑에 증인이 어디 있을까. 짐작하는 사람은 있어도 진지하게 너와 내 옆에서 마음을 가늠해 볼 수 있을 만큼 지켜본 증인은 없다. 하지만 몇 명의 증인을 세울 수는 있다.
증거물로는 너를 위해 쓴 자잘한 구매기록들과 영수증, 핸드폰, 그리고 상상 속에서 개발된 기억녹화 추출장치가 제출되어 재판정에서 재생된다.
기존의 양형기준은 충분히 부합하지 않아 재판연구원과 양형기준위원회는 무척 바빠진다. 너와 나의 사례가 그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회의와 연구가 꾸준히 이루어진다.
이 재판의 기록은 나의 ‘사자의 서(Book of Dead)’가 될 것이다. 정의의 저울 의식을 무사히 통과하여 저세상에 잘 도착하도록 도와줄 주문.
저울에 올려진 나의 심장은 여신의 깃털보다 무거울까 가벼울까. 수평을 잘 이룰 수 있을까.
나의 내적 갈등과 분쟁은 과연 잘 해결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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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며 머물며, 오늘의 BGM>
인과율 (Law of Causality) (by 우드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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