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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윤로윤 Oct 10. 2023

[괜찮은 인생을 살고 싶어]녹음이 지나가는 가을의문턱

그렇게 조금 더 포근해지는 계절이 오겠지


짙었던 녹음이 간다. 거실 통창 너머로 보이는 사이좋은 논들은 어느덧 가을옷을 꺼내 갈아입을 채비를 한다. 녹음과 금빛 사이에 걸린 이 계절이 참 좋다.


과수원의 마지막 복숭아가 떨어지고 나면 분주했던 여름을 놓아주는 계절이 온다. 아빠의 과수원 일을 도와가며 복숭아 판매를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여름이 다가오는 것도 잠시, 더 큰 부담감을 안고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한 계절을 보내고는 한다.


그렇게 치열한 여름을 누구보다 열심히 보내고 나면 쉴 수 있다는 안도감과 함께 약간은 공허한 마음이 한 번씩 들고는 하는데, 몇 년 전 그 해는 생각보다 길었던 힘듦을 거치기도 했다. 여름만 지나기를 바라며 연초부터 손꼽아 기다리던 해외여행도 다녀왔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시간을 내어 보고 싶던 영화도 보고 사고 싶었던 책들도 샀다. 나를 위로 하는 시간을 쏟고는 집으로 돌아와 소파가 아닌 바닥에 누워본다. 푸르른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몽글몽글 피어난 구름이 잔잔한 바람에 맞춰 아무도 없는 하늘길에 고요히 흘러간다. 그렇게 단잠을 잤다.


긴장 속에 살던 마음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한껏 느슨해진 몸을 일으켜 세우니 바닥에 누워 잠들었던 근육들이 아프다.


초록이 가득했던 창 너머 논 가에는 어느덧 노랑 물감을 풀어 초록도 노랑도 아닌 중간의 색으로 섞여가고 있다. 푸르른 하늘길에 고요히 불던 바람이 성실히 익어간 벼에게 수고했다는 위로를 보낸다. 볏 잎들은 그저 제 할 일 했을 뿐이라며 이미 숙여 있는 고개를 한 뼘 더 숙이고 만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딱 기분 좋은 바람이다. 푸르렀던 하늘의 색도 붉게 물들이는 고마운 바람이다. 그렇게 붉게 물든 해 질 녘의 하늘은, 산 너머 집으로 퇴근할 둥그스름한 해를 조금이라도 더 잡아 본다.


기분 좋은 바람이 조금 더 길게 불었으면 좋겠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바람이 불면, 황금빛 물이 든 논둑에는 출렁출렁 반짝이는 벼들의 춤사위를 볼 수 있을 테고, 해 질 녘 하늘은 빨강 물감을 조금 더 섞어, 더욱 짙어진 붉은색으로 물드는 계절이 시작될 테다.


그러고 나면 버거웠던 여름의 마음을 흘려보내고, 조금 더 여유롭고 조금 더 포근해지는 깊음이 생길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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