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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 Jul 31. 2017

뜨거운 고요

제주 '가파도'

매일같이 폭염을 주의하라는 문자가 날아오지만, 하루의 대부분을 에어컨 밑에서 보내는 통에 땀을 뻘뻘 흘리는 일은 별로 없다. 오히려 냉방병을 걱정하며 긴 옷을 챙겨 다닌다. 그래서 아주 가끔 온종일 밖에서 더위를 맛보게 되면 비로소 진짜 여름 안에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가파도’

제주에서 남쪽으로 배를 타고 십 분이면 닿는 작은 섬. 가파도에는 높은 봉우리나 가파른 절벽, 울창한 숲과 같은 강렬한 풍경은 없다. 대신 완만한 지형 덕분에 드넓은 밭이 펼쳐져 있다. 봄철에는 잘 자란 청보리를 구경하는 이들로 반짝 붐빈다. 사람들은 난이도 ‘하’로 표시될 만큼 만만한 올레 10-1 코스를 따라 보리밭을 가로지른다. 그 시기를 지나고 나면 배편이 매진될까 걱정할 필요가 별로 없는 고요한 섬이다.



선실에서는 외국어로 착각할 만큼 생소한 제주 방언이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폭풍 대화를 끝낸 현지인들은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고, 마을 입구에는 몇몇의 관광객만이 덩그렇게 남았다. 아침부터 폭염 경보가 요란하게 울렸던 터라 후끈한 공기를 밀어내고 바람을 끌어다 줄 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숨 넘어갈 오르막은 없다 하니 더위만 먹지 않기를. 멀리서 바다 냄새를 싣고 오는 바람에 감사하며 한적한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특별히 불뚝 솟은 곳도 내려앉은 곳도 없이 계속해서 쭉 뻗은 해안도로. 지나치게 뜨거운 날은 모두가 퍼지는 걸까, 오늘의 바위는 이글이글 찌는 듯한 더위를 삼키고 뻗은 것처럼 보였다.



보통은 섬 안쪽을 바라보면 하늘의 크기가 작아진다. 키가 큰 나무나 제법 높은 언덕, 아니면 이런저런 건물이 자리를 차지하곤 했다. 그런데 금세 하늘이 눈에 닿는다. 이런 게 정말 ‘완만하다’는 말인가 싶다. 양 옆에 바다의 짙은 파랑과 들판의 초록을 얕게 쌓고 그 위로 아주 넓게 하늘을 깔았다. 해안의 돌이나 길가의 풀은 생긴 대로 앉아 있다. 이따금 바람이 지나는 것을 알릴 뿐이다.



수확시기를 지난 한여름의 청보리밭 또한 마찬가지. 조용히 멈춰 서 있다. 아주 가끔 햇빛을 가린 외지인들이 지나갈 뿐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화려한 푸른빛이 바랜 계절은 쓸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바다를 향해 뻗은 산책로를 마주한 순간에 걱정은 모두 잊었다.



해안을 따라서 달리다 섬의 중심을 가른 후, 다시 바닷가로 나왔다. 한낮의 열기 때문에 눈 앞이 흐릿해진 걸까, 세상의 중심에 우리만 남아있는 것 같은 착각. 어렸을 때 동네를 쏘다니다가 아스팔트 길 위에 핀 아지랑이를 봤던 여름날이 떠올랐다. 매미의 울음소리가 가득했는데도 어쩐지 아득하고 적막이 흐르는 것 같던 그 순간. 시간도 공간도 모두 다른 곳에서 서로 닮은 장면을 본다. 이토록 뜨겁고 평온한 고요가 진짜 여름의 얼굴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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