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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 Sep 11. 2016

자연스러운 걸음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 제주도 '한라산'

걷기는 좋지만 오르기는 싫다. 당연히 글자 그대로 등산(登山)을 좋아할 리가 없다. 한창 사람들이 등산을 권하던 시절에는 리프트나 케이블카가 없는 산에는 안 간다고 여러 번 말해야 했다. 그 좋아하는 숲이 겹겹이 쌓여있다는데, 정말 우린 상극인 걸까?



한라산(漢拏山)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의무교육 덕분에 높이(해발 1,947m)나 분화구(백록담)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다. 제주도 한가운데 솟은 탓에, 날이 좋을 때면 멀리서라도 꼭대기를 바라보게 된다. 언제나 고요해 보이지만 사화산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곳. 높이에 따라 달라지는 생태가 아름답다는 설명도 어디에선가 읽은 듯하다.

한라산 어리목탐방로에서 보이는 백록담


No, Thanks

등산은 정말 싫다. 등산 전도(?)에 열을 올린 이들을 따라나섰더니, 밧줄을 잡고 암벽을 기어오르란다. 몇 번은 회사에서 야유회랍시고 등산을 한다기에 숨차게 올라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날의 경치가 떠오르지 않는다. 걷는 것도, 숲길도 좋아하지만 미친 듯이 오르는 행위에서는 어떠한 의미도 찾지 못했다. 게다가, 막걸리나 컵라면은 거기가 아니라도 맛있다.


Yes, I do

예전보다 체력도 약한 지금, 한라산으로 향한다. 걷는 게 좋아서 택했던 올레길에서 만난 '오름'덕분이다. 시작점부터 정상까지 천천히 더듬었던 풍경이 너무나 좋았다. 정상에 올랐다는 성취감이나 멋진 전망은, 과정을 충실히 보내고 나서 얻은 보너스 같았다. 한라산을 오르며 중간중간 만나게 될 자연을 기대하는 자신이 조금 신기하기도 하다.


어승생악산책로

한라산 능선을 따라 여기저기 늘어선 오름 중에 하나. 어승생악산책로는 왕복 1시간 정도 소요되는데, 한라산을 잠깐 맛보고 싶은 이들에게 적당하다. 시간이 부족한 사람, 관절이 걱정스러운 사람에게도 충분히 멋진 풍경을 선사해준다. 한라산 등반 코스인 어리목탐방로와 어승생악산책로 모두 어리목탐방안내소에서 출발한다. 아주 맑은 날에는 정상에서 백록담이 보인다던데, 오늘의 날씨는 어떨까.


전날 쏟아진 비로 세수를 마친 수풀의 얼굴이 말끔하다. 고사리과의 식물이 촘촘히 자라나 있으니, 역시 제주스럽다. 일제시대 군사시설의 흔적 앞에서는 마음이 무거워진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무색할 만큼 금세 도착한 정상에는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똑바로 서 있기가 힘들 정도의 세찬 바람. 모두가 납작하게 땅바닥에 붙어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본다. 하늘과 산과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참 좋다.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


어리목탐방로

마냥 어승생악을 독차지할 수는 없고, 정오까지 한참이나 남았다. 어승생악에서 맛본 경치가 너무 좋았고, 생각보다 수월했던 등산로에 힘이 났다. 겁이 많고 소심한 나답게 계산기를 두들겨보고서는, 어리목탐방로에 들어섰다. 그새 익숙해진 고사리과 식물들. 저들끼리 어깨를 맞댄 채 숲을 채우고 있다. 싱싱하게 잘 자란 나무들이 그늘 우산을 씌워주니 한여름의 타는 듯한 더위도 내 몸에 닿지 않았다. 어두운 수풀 사이의 경사로를 따라 한참을 올라갔다. 언제든 힘이 들면 그만두면 될 일, 숲 마저 신선한 공기로 나를 돕고 있으니 아직 괜찮다.


풍경이 갑자기 바뀌었다. 정말 만세다. 바람이 많이 부는 덕분에 시원해서 만세. 넓고 평평한 땅이 반가워서 만세. 구름이 오가는 모습이 아름다워서 만세. 해발 1,500미터가 넘는 다는데, 이렇게 평평한 산길이?

만세동산부터 완만한 지대가 펼쳐진다.


바람에 맞춰 들썩이는 모자를 붙잡은 채 등산로를 걷는다. 완전히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만 같다. 이렇게 생기 있고 따뜻한 초록이 있을까. 백록담의 옆모습이 보여서 또 만세. 어느새 구름에 가려졌지만, 얼굴을 비춰준 것만으로도 고맙다.

슬쩍 보이는 백록담


색색의 나비와 낮은 풀, 새초롬하게 핀 들꽃까지, 다양한 생명이 살아가는 현장. 파란 하늘과 들판에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 재주가 있었다면 그림으로 그려내고 싶을 만큼 탐나는 풍경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함부로 대하는 우리들. 쓰레기가 쌓인 곳에 하나를 더할 때는 아무렇지 않지만, 너무 깨끗한 곳에는 아무것도 버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여기서는 다들 후자의 기분이었을까, 어떤 마음이었건 간에 다행이고, 또 다행이다.


두 다리 뻗고 드러눕는 윗세오름에는 안개가 몰려들었다. 컵라면을 먹고 나니 완벽하게 전설의 고향이다. 신선이 사는 마을에 왔다 해도 될 것 같다. 날씨 변화가 늘 심하다는 걸 보면, 그다지 사람을 반기는 곳은 아닌가 보다. 희뿌연 안개에 취해 같은 곳을 빙빙 돌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윗세오름대피소


영실탐방로

어리목코스와 영실코스는 짝꿍인 셈이다. 생초보들이 선택의 기로에 서는 양대 코스. 어리목으로 올라 영실로 내려오거나, 영실로 올라 어리목으로 내려온다. 절벽의 경치가 그렇게 아름답다는 데 모두 미궁 속에.


얼마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안개가 녹아버렸다. 대자연님(?)께서 용기내고 올라온 나를 가엾게 여기신 건가. 안개가 사라지니 병풍바위와 영실기암이 드러난다. 또 다른 묵직함과 웅장함. 멀리서 보기엔 너무나 가늘어 보이는 폭포의 물줄기도 실제로는 엄청나겠지.  

병풍바위
영실기암


Try Again

겹겹의 숲에서 보낸 하루가 아직도 생생하다. 후에 울릉도 성인봉에 오르게 된 것은, 한라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작은 오름이었다. 스스로, 천천히, 온전하게 느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다음으로 향해갔다. 그동안 그렇게 산을 싫어했던 건, 정상을 향해 돌진했기 때문이다. 과정은 없고 결과만 있다. 우리 사회가 강요하는 삶의 방식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산을 오른다면서 산을 바라보지 않는다. 숨차고 괴로운 건 일단 참고, 앞만 보고 빨리 올라가라고. 왜 참아야 하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살면서 억지로 참아야 하는 순간은 생각보다 아주 빈번하게 찾아온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다른 때는 좀 여유를 가지면 안 되는 걸까?  따로 훈련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우리는 꽤 많이 참고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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