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반도주

육주동안(逳住東顔) 동남아 여행 번외 편 #04 - 캄보디아 프놈펜

by Mihyang Eun
스물다섯에 라디오 방송작가로 일을 시작해서
서른다섯에 다니던 스타트업을 그만둔 여자는
퇴사 18일째 되던 날 동남아로 여행을 떠났다.

이 이야기는 그 여자가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를 두루 다니고(逳)
잠시나마 살면서(住)
동(東)남아의
낯(顔)을 마주하러 떠난
육주동안(逳住東顔)의 여행 이야기,
다음스토리펀딩 연재의 '번외 편'이다.


여자가 프놈펜에 도착한 건 아침 여덟 시도 채 되지 않아서였다. 프놈펜에 가기로 결정하고 열두 시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방콕에서 여섯 시 반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려면 새벽 세 시 반에 숙소를 나서야 했다. 어중간하게 자다가 일어나는 것보다 잠들지 않는 것이 더 자신 있었던 여자는 늦도록 밤거리를 쏘다니며 남은 돈을 탕진하는 데 집중했다. 최소 일주일은 머물려던 방콕을 삼일 만에 떠나게 되면서 바트로 환전해 둔 돈이 쓸모없게 됐지만 프놈펜행 비행기표를 급작스럽게 예매했을 땐 이미 길거리 환전소도 모두 문을 닫은 후였다. 비행기표를 무를 수도 없고 남은 돈을 환전할 수도 없으니 여자에게 남은 선택지는 떠나기 전까지 남은 바트를 모두 써버리는 것뿐이었다.


야반도주에 가까웠던 프놈펜행은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한 파키스탄 남자로 인한 것이었다. 여자가 이 층 침대로 올라가기 전에 맞은편 일 층 침대를 쓰던 하싼과 몇 마디 나누고, 여행자 특유의 위아더월드 위아프렌즈 정신으로 너무 쉽게 소셜미디어 친구가 된 게 사달이었다. 한번 침대로 올라가면 다시 내려오기 힘들기 때문에 일 층 바닥에 있던 캐리어에서 이것저것 정리를 하고 있을 때 하싼이 팔찌가 예쁘다며 말을 걸었다.


방콕에 온 지는 얼마나 됐는지, 얼마나 더 머물 건지, 혼자 여행 중인지, 다음 목적지는 어디인지 하는, 전형적인 여행자 대화였다. 하싼은 옆 침대에 일이 층을 쓰던 남자 둘을 가리키며 사촌들과 함께 여행 중이라고 했다. 방콕에서 며칠 더 머물다가 말레이시아를 거쳐 노르웨이로 간다고 했는데, 파키스탄에서 태국, 말레이시아를 거쳐 노르웨이라니 좀 의외의 여정이라고 생각했다.


와아. 노르웨이라니. 좋겠다.


사촌이 노르웨이에 살거든.
쟤네 집에서 지낼 거야.
너는?


그때만 해도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지만 어쨌든 씨엠립에는 꼭 가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으므로 여자는 캄보디아에 갈 거라고 했다.


캄보디아가 어디야?
태국의 또 다른 도시 이름인가?


하싼은 의외로 캄보디아가 나라 이름인지조차 몰랐다. 여자는 캄보디아가 태국에 인접한 또 다른 나라의 이름이며 왜 거기에 가려고 하는지 좀 더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하싼은 자기도 가보고 싶다고 했고 여자는 노르웨이가 훨씬 더 좋을 것 같은데? 하고 듣고 넘겼다. 그런데 다음날 오후, 그러니까 여자가 아유타야 프라프리산펫 사원 입구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그날 최초의 여유를 누리고 있을 때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었다.


캄보디아 대사관에 비자받으러 가려고 해.

여자는 메시지를 보고도 무시했다. 전날 밤 페이스북과 카카오톡 친구가 됐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짧은 대화만 나누고 곧바로 친구를 맺는 건 평상시엔 흔히 하지 않는 일이었지만 어차피 온라인상에서의 관계인데 뭐가 대수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 행동은 그날 아침 곧바로 후회를 불러일으켰다. 하싼은 여자가 아유타야 투어 출발장소에 도착한 새벽 시간부터 연락을 했다. 처음엔 페이스북으로 안부를 물었고, 왠지 귀찮아서 그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은 척 답장을 않자 곧바로 카카오톡으로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여자는 거기에도 답을 하지 않았다. 점심시간에도 점심은 먹었는지, 여행 잘 하고 있는지 메시지를 보냈다.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가서 마주치게 되면 메시지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하싼이 오후에 보내온 메시지는 여자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캄보디아 대사관에는 왜? 말레이시아를 거쳐 노르웨이로 간다던 남자가, 캄보디아가 나라 이름인지, 도시 이름인지도 몰랐던 남자가 왜? 하는 의문을 품고도 역시 답장은 않은 채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곧바로 이런 메시지가 떴다.


괜찮다면,
캄보디아 여행을 함께 해도 될까?


사태가 이렇게까지 된 것은 모두 남자가 했던 말을 가벼이 들었던 여자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씨엠립과 앙코르와트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하싼은 흥미를 보였다. 자기도 가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여자는 설마 노르웨이에 가려던 남자가 캄보디아로 목적지를 바꾸지는 않을 거라 생각해서 그 말을 그냥 듣고 넘겼다. 아침부터 유난스럽게 페이스북이며 카카오톡으로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내올 때도 못 봤다고 하면 그만이라고 쉽게 생각했다. 그런데 비자를 받으러 대사관에 가겠다니. 그제야 여자는 이거 농담이 아니구나, 정말 큰일이구나, 싶었다.


여자는 고민 끝에 드디어 카카오톡 대화창을 열어 장문의 메시지를 썼다. 네가 캄보디아에 가고 싶어서 여행 계획을 바꾼다면 그건 네 마음이지만, 함께 여행을 하는 건 좀 곤란하다. 내가 혼자 여행을 온 건 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서였다. 이해해주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나름대로 신중하게 말을 골랐지만 다급하게 메시지를 전송한 후 다시 읽어보니 '혼자 있고 싶다'는 표현만 두서없이 몇 번이나 반복한 조악한 문장들이었다.


게스트하우스에 돌아가 하싼을 마주할 생각을 하니 너무 부담스러웠다. 아유타야에서 더위와의 사투에 가까운 하루를 보낸 여자는 그 메시지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방콕에 도착하면 우선 게스트하우스로 가서 쉬고 싶었지만 이제는 다시 그곳에 돌아가는 일 자체가 망설여졌다. 여자의 모든 짐이 거기 있지만, 하싼 또한 거기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방콕에 도착해서도 곧바로 게스트하우스에 가지 못하고 길거리를 떠돌았다. 가급적 빨리 그 게스트하우스를 떠나고 싶었고, 그래서 다음 목적지를 정해야 했다. 아유타야에 가기로 결정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행사에 붙은 광고를 훑었고 그때 시하눅빌(Sihanoukville)이라는 지명이 눈에 들어왔다. 시하눅빌은 캄보디아 남부에 위치한, 바다가 귀한 캄보디아의 유일한 해안 도시였다.


지금 가면 비가 많이 와서
서핑이나 해수욕 같은 건 하기 힘들 텐데요.

상관없었다. 여자는 아직 귓속 물을 말리고 있는 중이어서 어차피 물속에 들어갈 수 없는 신세였고 아마 앞으로도 영영 물은 바라만 보게 될 운명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좋았다.


비가 많이 온다면 "폭우가 속수무책으로 쏟아져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라고 말하며 정말 속수무책이 되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고, 비가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거긴 바다 말고는 별 게 없어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더라."라고 말하며 바닷가에서 마음껏 게을러질 수 있을 테니까. 여자에겐 여러모로 좋은 핑계가 되어줄 최적의 여행지인 셈이었다. 한국에선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핑계 없이는 마음 편히 빈둥댈 수 없었는데 여기는 그러려고 온 거니까.


거기다 '시하눅빌'이라는 지명도 몹시 마음에 들었다. 시하누크빌, 시하눅ㅋ빌, 시하눜빌...... 그 이름을 알사탕처럼 입 안에 넣고 요리조리 돌려가며 발음해봤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지기까지 했다.



시하눅빌에 가려면 우선 프놈펜을 거쳐야 했다. 육로로 태국과 캄보디아 국경을 넘을 경우 굳이 프놈펜을 거치지 않아도 되지만 그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여행이 끝날 무렵이라면 몰라도 그땐 겨우 여행 나흘째 되는 날이었으므로 여자는 돈보다 시간을 아끼기로 했다.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 만에 도착한 프놈펜은 수십 년 전의 서울 같았다. 물론 여자는 수십 년 전의 서울을 본 적이 없다. 오래 전의 서울을 자료화면을 통해서 단편적으로 접한 것처럼 프놈펜 역시 여행자로서, 그것도 여행의 목적지라기보다는 경유지로 단편적으로 접하게 될 거라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니 잘 알지 못하는 두 도시를 서로 비슷하게 느낀다고 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거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마치 그런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인 듯, 프놈펜은 곳곳에서 한국의 흔적을 꺼내 보였다. 공항에서 툭툭을 타고 강변 방향으로 향할 때는 도로에서 한국말로 '합동 익스프레스'라고 적힌 대형 트럭을 봤고 대로변 모퉁이에서는 트라이 매장 간판도 봤다. 이삿짐센터 광고가 붙은 차량은 알고 보니 한국에서 수입된 중고차였는데, 그 안에 이삿짐을 싣고 다니는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었다.



프놈펜은 다음날 시하눅빌로 이동하기 위해 어느 정도 어쩔 수 없이 간 곳이기 때문에 여자는 큰 기대가 없었다. 여행자로서의 설렘보다는 새벽 비행기를 타느라 피곤했던 몸을 누이고 싶은 마음이 훨씬 더 컸다. 하지만 기대가 없었기 때문인가, 거의 반나절을 푹 자고 느지막이 강변에 나가 보니 프놈펜도 꽤 괜찮은 곳이구나 싶었다.


프놈펜을 반으로 가르는 것처럼 보이는 강은 이쪽 끝과 저쪽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이어져 있었다. 일몰 시간이 머지않은 오후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여자는 그런 풍경을 이유 없이 편애했다. 강 성애자라 할 만큼 어떤 도시든 강이나 호수를 끼고 있으면 그걸로 그저 좋았는데, 프놈펜이 딱 그랬다.



프놈펜 관광에선 거의 빠지지 않는 코스가 왕궁이나 킬링필드 지역에 가는 거였다. 하지만 여자는 왕궁엔 취미 없었고 킬링필드는 의도적으로 피했다. 굳이 스스로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자는 오래전 폴란드 오쉬비엥침(아우슈비츠는 독일식 발음이다)에 다녀온 후 심한 감기 몸살과 장염에 시달리는 바람에 크라쿠프에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보내야 했던 경험이 있었다. 회사를 관둔 후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다는 생각으로 온 동남아 여행이었으므로 굳이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자고 생각했다. 프놈펜은, 이미 방콕에서 예상하지 못한 시달림을 받고 도망치듯 찾은 곳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그 강변이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프놈펜 시민들은 그곳에서 정말 여유로워 보였다. 그들이 마치 여자에게, 여긴 유명 관광지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매일을 사는 곳이기도 하니까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 또한 여자가 스스로의 마음을 편하게 하려고 만들어낸 억지 핑계일 뿐인지도 모르지만.


프놈펜을 좋아해야 할 이유는 또 있었다. 방콕엔 없던 아름다운 관행, 해피아워.


킬링필드 당시 외신들은 FCC(Foreign Correspondent Club/외신기자클럽)라는 레스토랑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여자는 괜한 호기심에 FCC를 찾아가 밥도 먹고 커피와 맥주까지 마셨는데, 이른 저녁에는 맥주 한 잔을 시키면 한 잔을 더 주는 해피아워 덕분에 활짝 열린 창 밖으로 퇴근하는 사람들과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그야말로 한없이 게으른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해피아워를 통해 마신 맥주 두 잔은, 행복까진 아니어도 여유를 만끽하기에는 충분했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창밖을 한 번 쳐다봤던 것 같고, 또 한 손을 턱에 괸 채 다음 한 모금을 마시기까지의 여유를 아무 생각 없이 즐겼던 것 같다. 프놈펜에서의 첫날밤은 완전히 끝나는 순간까지 그런 식으로 천천히 흘러갔다.



덕분에 여자는 다음날 아침 일찌감치 시하눅빌행 버스를 타러 갈 수 있었다. 버스는 몇 안 되는 승객을 태우고 남쪽으로 향했고, 남쪽이 점점 가까워올수록 비 또한 점점 더 많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발이 거세질수록 도로 양옆으로 펼쳐진 녹색도 눈에 띄게 짙어졌다. 한국에선 쉽게 보기 힘든 밀림의 색이었다.



여자는 그 밀림 속 도로를 지나며 독립영화를 만드는 C의 시나리오 중 한 편을 떠올렸다. 밀림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배경이었는데 독립영화로 만들기엔 규모가 너무 커서 오랫동안 시나리오로만 남아 있었던 이야기다. 그래서 여자는 만약 C가 그 영화를 찍게 된다면 그 장소를 추천해줘야지 생각하며 구글 지도에 그곳의 위치를 표시해뒀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을 버스는 밀림과 밀림 사이를 달렸다. 드문드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이 끼어들긴 했지만 마침내 시하눅빌이 가까워오기 전까지는 온통 나무, 나무, 그리고 또 나무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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