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가 있을 리 없지

육주동안(逳住東顔) 동남아 여행 번외 편 #05 - 캄보디아 시하눅빌

by Mihyang Eun
스물다섯에 라디오 방송작가로 일을 시작해서
서른다섯에 다니던 스타트업을 그만둔 여자는
퇴사 18일째 되던 날 동남아로 여행을 떠났다.

이 이야기는 그 여자가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를 두루 다니고(逳)
잠시나마 살면서(住)
동(東)남아의
낯(顔)을 마주하러 떠난
육주동안(逳住東顔)의 여행 이야기,
다음스토리펀딩 연재의 '번외 편'이다.


시하눅빌에 도착하니, 버스가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오토바이 기사들이 버스를 에워쌌다. 프놈펜에서 시하눅빌로 오는 동안 대부분의 승객이 내리고 남은 건 일곱 명이 전부라 얼핏 봐도 탈 사람보다 태우려는 사람이 많은 상황이었다. 도착하는 관광버스 주변으로 오토바이 기사들이 모여드는 것처럼, 여자도 버스를 내리면서 다른 여행자들을 슬쩍 물색했다. 목적지가 같다면 함께 이동하자고 제안할 만한 사람들을 찾기 위해서였다.


오래전 사라예보를 여행할 때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유적지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탈리아에서 온 한 커플이 택시를 함께 타자고 여자에게 제안한 적이 있었다. 택시비를 나눠내자는 거였지만 그게 인연이 돼 그들이 초대한 저녁식사 모임에 가게 됐고 그곳에 함께 봉사활동을 왔다는 친구들 무리와 며칠간 너무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경험이 있어서, 교통비를 나눠내며 함께 이동하는 것으로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되면 좋고 그게 아니어도 교통비는 아낄 수 있으니 용기를 낼만했다.


하지만 그날 시하눅빌에 내린 일곱 중 여섯은 모두 커플이었다. 더구나 시하눅빌엔 툭툭이 없는 모양이었다. 여행자들을 태우려고 흥정하는 기사들은 모두 오토바이 기사들이어서 각자 자기 키의 절반도 넘는 배낭을 메고 있던 커플들도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자로서는 숙소까지 걸어갈 생각이 아니라면 그 오토바이 중 하나를 타는 것 말고 달리 방법이 없어 보여서 우선 화장실부터 갔다. 기다린 시간에 비해 승객수가 너무 적어 절박해진 기사들에게 시달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자도 오랜 시간 이동으로 지쳐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동안 다른 여행자들이 흥정을 끝내고 떠날 테니 그때 남은 오토바이 중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을 탈 생각이었다.


화장실에서 꽤 늑장을 부린 후에 다시 버스가 떠난 공터로 나간 여자는 여행자들이 모두 그곳에 남아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한 커플이 여자에게 어떻게 할 계획인지 먼저 물어봤는데 그래 봐야 별다른 방법은 없었고, 이 킬로미터 남짓의 가까운 거리긴 했지만 걸어갈 자신은 없었다. 오토바이 기사들로서는 경쟁이 치열한 상황이라 대충 흥정해서 한 명이라도 태우고 갔을 거라 생각했는데 쉽사리 흥정이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자 역시 마음먹은 만큼 깎지 못했지만 처음부터 염두했던 게스트하우스 '유토피아'의 위치를 잘 안다는 기사의 오토바이를 탔다. 유토피아에서 가장 저렴한 방의 숙박비는 하룻밤에 겨우 일 달러라는 소문을 듣고 호기심에 그곳에 가보려는 것이었는데, 오토바이 택시비는 이 달러였으니까 교통비가 더 비싼 셈이었다.


오토바이는 정확히 유토피아의 프런트 바로 앞에 여자를 내려줬다. 버스정류장에서 뭔가 커다란 동상이 있어서 중심가로 보이는 곳을 지나 해변과 가까운 번화가로 이동하는 데는 오 분도 채 걸리지 않아서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웬 친절인가 싶을 만큼 신속하고 정확한 안내였다. 여자를 내려준 택시기사는 게스트하우스 직원과 몇 마디를 주고받았는데 그리고는 약간의 돈을 챙겼다. 아마도 여자를 데려다준 대가인 것 같았다. 여행지에서 그런 거래야 흔해빠진 것이라고는 해도 그렇게 손님이 보는 바로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거래를 하는 건 또 처음이어서 오히려 신선한 광경이었다. 그래, 계산은 미루지 않는 편이 좋지.


유토피아 사람들은 이후에도 그런 식으로 어딘가 쿨했다. 세상에서 가장 싼 게스트하우스를 너희가 찾아왔고 우리는 정말로 단돈 일 달러에 너를 재워줄 것이다. 그러니 서로 너무 많은 기대는 하지 말자는 듯이.


뭔가를 물어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는 만큼 대답은 해주겠지만 묻는 사람이 필요로 하는 이상의 친절은 베풀지 않았다. 게스트하우스 안에는 선풍기는 물론이고 에어컨까지 달려 있었는데 에어컨은 트나 마나이고 선풍기는 고장 난 것이었지만 뭘 바래 하는 생각을 자기도 모르게 하게 되는 그런 곳이었다. '유토피아'라는 건 어쩌면 그곳에 묵는 여행자들보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더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일 달러짜리 침대 있나요?


없어요. 이 달러짜리는 있는데 줄까요?



일 달러짜리 침대가 없다고 할 때도 그랬다. 침대값이 오른 건지, 일 달러짜리 침대가 있지만 이미 다른 여행자들 차지인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여자는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했기 때문에, 아마도 거기 바로 그 유토피아가 여자가 앞으로 평생 체험해볼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저렴한 게스트하우스일 것이었으므로, 어쨌든 하룻밤은 거기서 묵기로 하고 안내를 받았다.


싼 게 비지떡. 원래 여자는 그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비지떡을 먹어본 적도 없을뿐더러 싸다 비싸다 하는 단 한 가지 기준으로 떡 맛을 논하기엔 떡 맛을 결정하는 변수가 너무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다. 사물함 키를 받아 도미토리 문을 여는 순간 여자는 즉시 그 말을 떠올리고 말았지만.


이 달러가 산술적으로는 일 달러의 두 배 값어치라도, 백 달러짜리 방 대신 얻은 이백 달러짜리와 같은 극적인 차이를 기대해선 안 되는 거였다. 일 달러짜리 방도 여전히 운영되고 있는 거라면 대체 거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공간이었다. 나름대로 이런저런 게스트하우스의 이런저런 도미토리를 많이 겪어본 여자였지만 그런 형태의 방과 침대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우선, 그 방은 기역자 모양의 일 층과 이 층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층이라봐야 두께 십 센티미터가 조금 넘어 보이는 나무로 된 것을 몇 개의 나무 기둥이 받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일 층과 이 층에는 일곱 개의 매트리스가 서로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유토피아'의 존재를 알게 해 준 블로그에는 돌아누우면 옆에 누운 사람과 하이파이브가 가능할 정도라고 했다. 그것이 그 블로거의 재치 넘치는 비유일 거라 생각한 건 전적으로 여자의 오산이었다. 그건 메타포가 아니라, 극사실주의 묘사였다.


만약 기역자로 꺾인 곳에, 유일하게 양 옆에 타인 없이 혼자 누울 수 있는 공간이 비어있지 않았다면 여자는 이미 치른 숙박비를 손해 보더라도 다른 곳으로 옮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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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까지 포기하고 나면 더러운 바닥과 고장 난 선풍기와 차마 눈 뜨고 샤워하기 힘든 욕실은 말할 거리도 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을 포기하고 나면 그 외의 것은 모두 사소하게 느껴지게 마련이었다. 혹은, 가장 중요한 것을 이미 포기했기 때문에 그 외의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는 논할 자격을 스스로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여자는 오히려 마음이 편하네, 생각하며 낙천성의 극치를 발휘해보기로 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도미토리에 묵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깨끗이 정리해두고 소지품 단속에도 신경을 쓰게 되는데, 여기서는 아무렇게나 짐을 놓고 나가더라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다. 일 층 한가운데 매트리스에서 속옷만 입고 누워 대자로 뻗은 채 잠들어있던 남자를 여자가 전혀 개의치 않은 것처럼(이라기보다는 무척 노력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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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짧지만 강렬한 고뇌의 시간을 보낸 후 여자는 마치 모든 고뇌가 털어질 거라는 듯 연극적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털고 나서 최대한 가벼운 차림으로 해변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밤새 그곳에 앉아 맥주나 마시고 바닷소리나 듣고 그럴 작정이었으니까 숙소는 중요치 않다. 밤을 새울지도 모르고 굳이 그곳에 누워 자지 않게 되는 파티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뭐 그런 바라지도 않았던 헛된 기대를 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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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에서 해변까지는 걸어서 오 분도 걸리지 않았다. 해변 입구에 도착하자 저 멀리까지 사람들과 식당들과 불빛들이 보였다. 파도치는 곳에서 대략 오십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각종 식당 건물들이 나란히 들어서 있었고, 건물과 파도 사이 모래사장 위에 의자와 테이블이 잔뜩 놓여있었다. 여자는 대충 삼분의 일 지점쯤에 바다와 가장 가까운 테이블이 비어있는 것을 보고 그곳에 앉았다. 아아 조금 꿉꿉하다, 는 생각을 하며 의자에 앉아 어깨에서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식당 직원이 달려와 페트병 안 모래에 꽂아둔 초에 불을 붙여줬다.


여자는 볶음밥과 생맥주를 주문했다. 프놈펜에서 묵었던 호스텔에서 아침을 먹고, 시하눅빌로 오는 길에 들렀던 작은 휴게소에서 컵라면을 하나 먹은 후 첫 끼였다.


여자가 앉은 대나무로 짠 의자는 구조상 대충 앉을 수가 없이 몸이 푹 파묻히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의자에 왜 앉은 건가 싶을 만큼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하체에 힘을 실어 의자 끝에 살짝 걸터앉는 수밖에 없었는데, 아무래도 그렇게 온몸을 파묻고 있기에는 쿠션이 너무 눅눅해서 쿠션 없이 앉아보기도 했지만 그러기에는 얼기설기 짜인 대나무가 너무 단단했다. 과연 이곳에 놓인 쿠션들은 그건 얼마 만에 한 번씩 세탁될까. 세탁을 한다고 한들, 이런 날씨에 완전히 말라본 적이나 있을까.


피곤했지만 거기서도 차마 편히 등을 기대지 못하고 의자 끝에 엉덩이만 걸치고 앉아 있자니 금세 맥주가 도착했다. 여자는 일단 폐활량이 허락하는 만큼 첫 모금을 힘껏 들이켰다. 그러고 나니 여자의 몸은 저항 없이 자연스레 쿠션 깊숙이 파묻혔다. 순식간에 묵직해진 위장이 여자의 등과 어깨를 아래로 누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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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그렇게 한참을 눅눅한 쿠션에 등을 기대고, 습기 가득한 바닷바람에 앞을 맡겼다. 밥을 다 먹고 맥주를 한 잔 더 마시는 동안에도 아까 그 밤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밤은 길고, 여자는 혼자였다. 혼자인 여자는 뭐든 할 수 있었지만 혼자였기 때문에 별다른 일이 없기도 했다. 가장 좋은 건 책을 읽는 것이었지만, 비를 잔뜩 머금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에 의지해서는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선택이라고 해봐야, 그게 꼭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어도 아마 비슷했을 것이다.


여자는 맥주를 한 잔 더 하고 취해서 잠들기 위해 유토피아의 바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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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는 숙박 공간보다는 파티 공간이 더 넓은 곳이었다. 성수기에는 파티가 끊이지 않았지만 여자가 머무르던 때는 비수기로 시도 때도 없이 비가 쏟아졌으므로 파티는 없었다. 다만 건물 한가운데 오두막 같은 공간에서 바가 운영되고 있었다.


여자가 바로 갔을 땐 열 명 남짓한 여행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바 한쪽 끝에는 한 여자가 우쿨렐레를 치며 라이브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그 여자를 제외하면 일행 없이 혼자 술을 마시는 여행자는 아무도 없었다. 취할수록 목소리가 커지는 키 큰 러시아 여자와 남자 몇이 섞인 무리를 제외하면 음악 소리보다 목소리가 더 큰 사람도 없었다. 동양인 손님은 여자가 유일했다. 혼자인 손님이 있다면 말을 걸어볼 생각도 있었는데 얼핏 둘러봐도 그럴 만한 사람이 없어 보여서 여자는 수영장 외곽에 놓인 바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쨍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여자의 라이브를 서너 곡쯤 들으며 맥주 한 잔을 다 비워갈 때쯤이었다.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비가 오네, 하고 생각하기도 전에 어깨가 푹 젖을 만큼 엄청난 폭우였기 때문에 여자는 지붕 아래 바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처음부터 혼자 여행을 떠나온 거긴 하지만, 방콕에서는 과도하게 호감을 표시하는 남자를 피해 도망 온 거긴 하지만, 방콕을 떠난 이후 내내 혼자여서 왠지 울적하고 의기소침한 상태였던 여자는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다렸던 순간이 바로 그런 순간인 것 같았다. 엄청난 빗소리에 모든 소음이 묻히고, 잠시 후에는 바의 전기가 완전히 나갔다. 스피커로 들리던 가수의 목소리는 오히려 더 가깝게 들렸다.


누군가가 나타나 천장에 있는 뭔가를 만지자 다시 불이 들어왔고, 비는 여전히 세차게 내렸고, 술에 취한 데다 흥까지 오른 러시아 여자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고, 가수는 쉬지 않고 노래하고, 다시 불이 나가고, 비가 내리고, 러시아 여자가 소리 지르고, 가수가 노래하는 그런 상황이 몇 번이고 반복되는 밤이었다.


가수가 노래를 멈추고 러시아 여자도 입을 다문다면 빗소리만 남을 텐데. 함께 온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말소리 정도는 빗소리에 완전히 묻혀버렸을 테니까 가수가 노래를 멈추고 러시아 여자도 입을 다문다면 그곳에 빗소리만 남았을 테지만, 가수는 노래를 멈추지 않았고 러시아 여자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먼저 멈춘 것은 영원히 내릴 것 같던 폭우였다.


다음날 여자는 일어나자마자 유토피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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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에서 여자가 누워 잠을 청한 매트리스 바로 옆으로 창이 나 있었는데, 그 창은 밤새도록 바에서 틀어놓은 음악 소리와 러시아 여자의 우렁찬 목소리를 고스란히 실어 날랐다. 비가 많이 오고 난 후에는 소리와 냄새가 훨씬 더 멀리까지 훨씬 더 생생하게 전달되는 법이다. 덕분에 매트리스 위에 몸을 뉘고도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잠든 여자는 그렇게 불편한 곳에서도 꽤 늦게까지 잠을 잤다. 보통 열두 시에 체크아웃해야 하는 다른 게스트하우스와 달리 유토피아는, 그게 오후 한 시였는지 두 시였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체크아웃 시간이 여유로웠다. 그나마 그거 하나, 그래서 유토피아인가보다 생각하며 여자는 깨어났다 잠들고 깨어났다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


에어컨을 흔히 접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 한여름 낮에 잠이 들면 온몸이 땀범벅이 되곤 했다. 그렇게 땀을 흘리면서 자는 낮잠에서는 쉽게 깨어나지지가 않았다. 몸과 바닥 사이가 축축해지도록 일어나지 못하고 장판에 들러붙은 채 다른 계절의 낮잠보다 훨씬 긴 낮잠을 자곤 했다. 마치 그때처럼, 여자는 젖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을 일으키지 못한 채 체크아웃 시간 직전까지 자고 또 잤다. 부끄러움도 잊고, 처음부터 없었던 그날의 계획 따위도 모두 잊고.


어차피 둘째 날은 다른 곳에서 묵을 생각이었고 전날 해변을 오가며 미리 봐 둔 곳도 있었기 때문에 눈곱만 떼고 체크아웃한 후에 옮긴 숙소에서 씻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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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는 하룻밤에 이 달러지만 수건을 따로 주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하게 수건 사는 데 이 달러를 썼으니 결과적으로는 하룻밤 사 달러짜리였는데 새로 옮긴 인코그니토는 깨끗이 세탁된 시트와 이불이 깔린 침대가 있는 개인실이 겨우 오 달러였다. 욕실을 공동으로 쓰긴 했지만 유토피아의 욕실보다 깨끗하게 쾌적한 건 두 말할 나위가 없었다. 에어컨은 없었지만 선풍기가 문제없이 돌아갔다. 작은 돈 아끼려다 오히려 큰돈 쓰고 큰 불편 감수하는 게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고 물론 마지막도 아니었지만, 돈 주고도 사기 싫은 불필요한 경험을 굳이 돈 주고 산 것 같은 자괴감이 드는 비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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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만족스러운 새 숙소에서 완전히 새로운 두 번째 날을 맞이했지만 날씨는 전날과 다르지 않았다. 폭우가 왔다 가기를 반복했다. 어차피 그곳에서 할 일은 많지 않았다. 여자는 전날 저녁을 먹었던 식당에 마치 단골인 양 다시 가 점심을 먹었다.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맥주도 마시면서 책을 읽고 그날을 기록했다.


여자가 시하눅빌에서 새롭게 읽기 시작한 책은 플로리안 일리스의 『1913년 세기의 여름』으로, 서양인들이 불길하게 여긴 13이라는 숫자가 들어간 이십 세기 초반, 강대국들이 식민지 건설로 세력을 키워가던 제국주의의 정점, 일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기 전인 1913년 당시를 불안하게 살아내던 예술가, 정치가, 과학자 등 누구나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시간순으로 기록한 것이다.


스탈린과 히틀러부터 카프카, 릴케, 프루스트, 제임스 조이스, 로베르트 무질, 토마스 만, 아르투어 슈니츨러, 프로이트, 융, 피카소, 키르히너, 프란츠 마르크, 마르셀 뒤샹, 카지미르 말레비치, 아르놀트 쇤베르크, 아돌프 로스, 아인슈타인, 슈바이처, 비트겐슈타인, 코코 샤넬 등 삼백 명이 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저자 플로리안 일리스가 이들 각자의 삶과 예술, 그리고 그들 간의 연결고리를 재구성해 1913년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비록 여자는 그들처럼 훌륭한 예술가도 아니고 훌륭한 걸 떠나 예술가조차 아니었지만, 어딜 가나 또래들을 만나 쉽게 친구를 사귀던 십여 년 전 배낭여행과 달리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며 기대보다 좀 더 외로운 시간을 혼자 보내는 중이었지만, 백여 년 전 예술가들의 시답잖고 인간적인 고뇌를 읽으며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카프카 같은 작가도 연애엔 젬병이며 상대방의 진실한 애정에 응답할 기회란 기회는 모조리 말도 안 되게 날려버리고 평생을 외로웠는데, 생각하며 맥주를 홀짝이는 시간이 쓸쓸했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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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사이 매니큐어가 잔뜩 든 바구니를 든 여자아이 두어 명이 다가와 매니큐어가 지저분하게 지워진 여자의 손톱과 발톱을 손질해주겠다고 했고, 작고 마른 여자가 다가와 발마사지를 권했지만, 여자는 왠지 그 정도의 간단한 일조차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비는 끊임없이 내리고 멈추기를 반복했다. 거기 몇 시간을 가만히 앉아있는 여자보다 훨씬 더 분주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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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에 의자를 깔아놓고 손님을 기다리던 식당 직원들도 여자처럼 의자에 몸을 묻고 농담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갑자기 비가 내리면 모래사장에 나가 쿠션을 걷고 의자를 엎어놨다가 비가 그치면 다시 의자를 똑바로 놓고 쿠션을 털어서 얹는 일을 반복했다. 그 사이 손님이 한 번도 앉지 않았어도 염분 가득한 바닷바람이 수도 없이 앉았다 갔을 것이므로 쿠션은 계속 조금씩 더 눅눅해졌는데, 그러면 한 번 털어서 뒤집어놓았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도시 전체를 가득 채운 습기를 어찌할 수는 없었겠지만 여자는 그 후로 동남아를 여행하는 내내 시하눅빌에서 관찰했던 그 행동을 반복했다. 앉기 전엔 항상 쿠션을 뒤집었다. 그래 봐야 여자가 뒤집기 조금 전에 누군가가 뒤집어놓은 것을 또 금세 뒤집은 것일 뿐이었겠지만 그렇게 하면서 여자는 왠지 모를 안도감과 익숙한 편안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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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눅눅한 쿠션에 거리낌 없이 앉는 법을 배운 것 외에 여자는 시하눅빌에서 둘째 날 뭘 하며 보냈는지 별로 기억하는 바가 없었다. 인근 여행사에 빨래를 맡기고, 시내를 한 바퀴 돌며 걷고, 헌책방에 가서 곧 모래처럼 바스러질 것 같던 헌책들을 구경하고, 다시 해변에 가서 밤새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인코그니토로 돌아가 일기를 쓰고 잠이 들었던 것 같다는 것 정도가 기억의 전부였다.


여자는 다음날 시하눅빌을 떠났다. 방콕이나 시하눅빌보다는 좀 더 오래 머물 만한 곳을 찾고 싶었다. 인코그니토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맞은편 여행사에서 빨래를 찾은 후 예약해둔 미니밴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폭우는 그칠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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