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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hyang Eun Dec 24. 2018

2018년 12월 2일 일요일의 일

오랜만에 카우앤독에 갔다

2018 12 2일 일요일지


오랜만에 카우앤독에 갔다. 


카우앤독은 쏘카 다니던 시절 합정에 이은 두 번째 사옥에 있던 공간 이름이다. 아쉽게도 그 건물에서 일한 기간은 길지 않다. 2014년 12월 사무실을 옮겼는데,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두 번째 중이염 수술을 했고, 수술한 부위에 재감염이 일어나 보름 정도를 재입원했으며, 퇴원하고도 낫질 않아 한 달 동안 휴직한 후 결국 5월 말 퇴사했다. 실제로는 넉 달 반 좀 넘게 다닌 셈이다. 카우앤독 4층에 쏘카 사무실이 있을 땐 오히려 성수동에 집을 구하지 못해 성신여대 쪽에서 출퇴근했는데, 지금의 회사로 옮긴 후 우연히 조건에 맞는 집을 성수동에 얻게 됐다. 그리고 최근엔 카우앤독에서 더 가까운 곳으로 한 번 더 이사를 하게 됐다.


CoW&DoG은 “Co Work & Do Good”에서 따온 이름으로, 3~4층은 사무실이고 1~2층은 소셜벤처들의 카페 겸 코워킹 스페이스다. 뛰어서(왜?) 2분 거리에 있지만 이사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선뜻 가지지 않았다. 집 바로 앞에 예쁜 카페가 있기도 했지만, 말 그대로 ‘선뜻’ 가지지가 않더라. 하지만 집 앞 예쁜 카페는 예쁜 탓에, 대체로 너무 시끄러워서 집중해서 작업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사 두 달여 만에 처음으로 카우앤독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더는 그 공간을 함께 아는 사람이 거기 없었고 멤버십 할인도 없어졌지만 공간만은 여전히 너무도 익숙했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그곳에서 오랫동안 미뤄뒀던 나일선 작가의 단편소설집 편집을 시작했다. 


공간이 넓은 탓인지, 날이 흐린 탓인지, 커피가 식을 때쯤 몸도 식어 조금 서늘했다. 추운 날 어떤 실내에 들어갈 때는 따뜻함을 기대하게 된다. 처음 들어가는 순간에는 바깥과의 온도차 때문에 온몸에 달려드는 온기를 느낀다. 하지만 몸이 그 온기에 적응하면 더 이상 그만큼의 온기를 느낄 수 없게 된다. 처음보다 더 큰 온기, 더 강력한 온기가 제공되지 않는 이상 내 몸과 공간 사이의 온도차는 서서히 줄어들어 다시 서늘함을 느끼게 된다. 추운 겨울에 공간이 넓은 카페에 들어가면 대체로 이런 수순으로 온기와 한기를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카우앤독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대부분 각자의 작업에 집중하는 분위기 덕분인지, 아니면 정말 오랜만에 편집을 하기 때문인지 이상하게 집중이 잘 됐다. 심지어 편집이 재미있기까지 했다. 아마도, 나일선 작가의 소설이 재미있어서였던 것 같다. 편집도 하기 싫을 때 억지로 하면, 서사나 감정은 읽히지 않고 그저 눈으로 글자만 쫓아가게 된다. 기계적으로 맞춤법 맞추고, 비문 고치고, 어떨 때는 꼼꼼하게 메모도 남기지 않은 채 (그러면 안 되는데) 맞춤법 검사기라도 된 것처럼 그저 수정만 하기도 한다. 반대로 즐겁게 편집하면 서사와 감정이 읽히고 인물이 구체적으로 그려져서 편집도 그 자체로 즐길 수 있게 된다.


사실 그동안 <영향력>을 '조금' 쉬기로 하면서 생각보다 길게 게으름을 피웠다. 원래는 지금보다 더 '조금' 쉬고 더 빨리 다시 시작하려고 했는데, 그래서 지금쯤이면 이미 단행본이 나오고도 남았어야 하는데, 애당초 우리가 필요할 거라고 예측했던 '조금'은 생각보다 좀 더 긴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쉬면 쉴수록 더 쉬고 싶었고, 더 하기 싫어져서 자꾸 미루기만 했다. 그러다 2018년이 이제 정말 두 달도 안 남았잖아! 새삼 놀라서, 달아나는 시간을 깨달은 걸 계기로 다시 조금씩 시작했다. 시작은 했지만 마구 속도가 나지는 않았는데, 오늘 처음으로 다시 이 일이 즐거워진 것이었다.


11월 중순에 치앙마이로 6일 정도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그동안 소설과 시 외에 길고 짧은 메모를 꾸준히 써왔지만 오랫동안 '일기'라 부를 만한 건 쓰지 않았는데, 반캉왓이라는 예술가 마을에서 갈색 가죽으로 싸인 노트를 사 왔고,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거기에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해 꾸준히 일기를 쓰고 있다. 비록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내용들만 가득할 뿐이지만 매일 사사로운 것들을 쓰고 있다는 것이 요즘의 내게는 꽤 도움이 된다.


그런데 오늘, 마지막으로 편집한 나일선 작가의 단편 <우리는 극장과도 같다>에서 “부드러운 가죽으로 싸인 갈색 노트”가 등장한다는 것을 재발견했다. <우리는 극장과도 같다>는 다섯 번째 <영향력>에 실은 작품이라서 (<영향력은 현재 10호까지 나왔다) 세부사항은 어느 정도 잊고 있었는데, 소설에서 화자가 선물 받은 일기장과 내가 치앙마이에서 사 와 일기를 쓰고 있는 일기장의 외형이 너무 똑같았던 거다. 


이 소설에서는 누군가가 노트에 쓴 일기가 이야기를 끌어가는 중요한 소재다.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이렇게 내가 읽는 텍스트와 실생활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우연히 발견될 때 알 수 없는 힘과 희열을 느낀다. 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끌리고 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더 강력한 어떤 힘. 가끔은 내가 힘을 내서 뭔가를 끌어갈 때보다, 강력한 어떤 힘에 끌려갈 때 더 자연스러운 삶의 당위성 같은 걸 느끼기도 한다.


이런 내게 "부드러운 가죽으로 싸인 갈색 노트"는 단순한 맥거핀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아주 교조적인 마지막 문장도 뻔뻔하게 쓸 수 있다.  


"소설이 누군가의 일기 때문에 시작된 것처럼, 이렇게 재발견한 우연이 내가 다시 책 만들기를 시작할 힘을 주려는 것 같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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