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거의 못 잤다
2018년 12월 3일 월요일지
잠을 거의 못 잤다.
어제 단행본 편집이 재미있다고 느낀 게 일종의 각성이 됐는지, 무려 단편 여섯 편을 편집한 것으로도 모자라 일기도 쓰고 책도 읽고 이래저래 끄적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많은 걸 하고 열두 시 조금 넘어 잠들었다. 열 시 시 조금밖에 안 넘었는데 졸음이 오는 걸 느꼈을 때 기분 좋았다. 하루를 알차게 보내고 너무 늦지 않게 잠들 수 있게 돼서 왠지 특별하고 대단한 일을 해낸 기분이었달까. 자기 전에 우유도 데워 마셨는데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새벽 두 시쯤 다시 눈이 떠졌다. 여섯 시까지 다시 잠들지 못했다. 그래서 또 일기를 더 쓰고, 롤랑 바르트의 <마지막 강의>에서 하루치 강의를 읽고, 다시 하루치 강의를 더 읽은 다음, 대부분의 시간은 눈 감고 잡생각을 했다. 잡생각이 어떤 생각인지는, 일기장에조차 차마 쓰기 부끄러운 것이어서 어젯밤 깊은 곳에 묻어둔다.
여섯 시 넘어 다시 잠들었던 것 같고 아홉 시 반에 일어났다. 예전부터 나는 잠을 잘 못 자면 몇 시간 잤는지 의식적으로 계산하지 않으려고 했다. 많이 자도 어차피 피곤한데, 어젠 세 시간밖에 못 잤네, 네 시간밖에 못 잤네, 하는 식으로 수치화되면 더 피곤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잠이 안 올 땐 시계도 잘 안 본다. 자야 하는데 못 자고 시간이 새벽 네 시, 다섯 시 넘어가는 걸 눈으로 보면 더 초조해지기만 할 뿐이니까. 하지만 이제는 안다. 계산 하나 안 하나 못 자면 피곤하다. 오래 자도 피곤한데, 못 자면 더 피곤한 건 너무 당연한 거다.
겨우 일어나 씻고 출근해 어찌어찌 업무를 해내고 퇴근한 후에는 집에 가자마자 잤다, 라고 쓰는 게 자연스럽겠지만 스쿼시 수업에 갔다. 일주일에 세 번, 월수금 밤 아홉 시에 특별한 일 없으면 스쿼시 하러 간다. 특별한 일 없어야 스쿼시 갈 수 있으니까 월수금에는 웬만하면 특별한 일을 만들지 않고, 웬만큼 특별한 일 아니고서는 스쿼시를 포기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토요일에도 동호회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오래 있을 땐 거의 다섯 시간을 그곳에서 보낸다. 작년 4월 스쿼시를 처음 시작한 이후 스쿼시가 생활의 중요한 축이 됐다.
크지 않은 네모난 코트 안에서 오로지 작은 공의 움직임을 좇는 것(사실 아직도 잘 못 좇는다), 그 공을 정확히 맞추려고 라켓을 휘두르는 것(사실 아직도 스윙이 많이 부족하다), 게임을 하는 상대의 움직임을 읽고(사실 아직도 잘 못 읽는다) 상대가 친 공의 속도에 맞춰(사실 아직도 잘 못 맞춘다) 움직이며 맞받아 치는 것(사실 못 맞받아 치는 공이 더 많다)이 너무 즐겁다. 아직도 여전히 잘 못하지만 오직 공과 상대방의 움직임에 따라 나도 움직이면 되니까, 그것 말고는 다 잊을 수 있으니까 그게 그냥 마냥 좋다.
이성복 선생님께서 <끝나지 않는 대화>에서 테니스 잘 치는 사람에 대해서 얘기하신 적이 있는데 스쿼시도 비슷하다. 스쿼시를 잘 치게 된다는 것은, 조화를 만들어낼 줄 안다는 것이다. 어떤 리듬에 내 리듬을 맞춰 리듬과 리듬의 조화를 만들어낼 줄 알게 되는 일이다. 그래서 잘하는 사람의 움직임을 구경만 해도 즐겁다. 나보다 잘 치는 사람이 나를 이리저리 뛰게 만들어도 그저 재미있다. 반대로 못 치는 사람 간의 게임을 보면 불안하다. 특히 나처럼 잘 치지 못하는 사람, 혹은 나보다 잘 치지만 아직 상대를 보면서 힘과 방향을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과 게임할 때는 힘들고 가끔은 무섭기까지 하다. 공이 어디로 올지 모르고, 얼마나 세게 올지 모르기 때문에 무섭고 내가 맞춰서 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니 똑같이 움직여도 더 피곤하다.
하지만 잘 치는 사람이라고 항상 잘 치고 못 치는 사람이라고 항상 못 치는 것만은 아니어서 가끔은 잘 치는 사람이 못 치는 사람에게 맞춰주려고 하다가 점수를 잃기도 한다. 이때 벽에 맞고 나온 공을 생각처럼 잘 치지 못했을 때 반응이 사람마다 참 다르다. 전혀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멋쩍게 웃어버리고 마는 사람도 있고, 발을 구르며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고, 가끔 잇새로 된소리가 나오는 경우도 있다. 우리 반은 아직은 초보가 많아서 대체로는 멋쩍게 웃거나 상대방에게 미안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조금씩 실력이 좋아지면서 탄식도 늘어간다. 전에는 하나도 아쉽지 않고 아깝지 않았던 기회가, 한 번이라도 더 맞춰내는 것으로도 기분 좋았던 경우가, 이제는 아쉽고 아깝고 애가 닳는 거다.
오늘 스쿼시를 치고 나오면서 “금요일에 봬요.” 하고 인사했다.
“왜요? 수요일에 못 나와요?”
“오늘 수요일 아니에요?!”
“오늘 월요일이에요.”
아마 그때 나라라도 잃은 듯한 표정이 나왔던 것 같다. 내가 내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너무 본능적으로 감정을 표출할 때는 대체로 우스운 얼굴이 되고, 그건 상대방의 반응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웃으면서 헤어졌지만 그 순간 나는 진심으로 절망했다.
애써 넘기려 했던 오늘 업무의 스트레스가 그렇게 나도 모르게 뿜어져 나왔던 것 같다. 오늘이 월요일이라니, 벌써 12월이라니, 그런 것들을 새삼스럽게 인지할 때마다 무력함을 느낀다. 내가 전혀 손쓸 수 없는 것들, 시간 안에 놓여, 바람 없는 강물 위를 떠다니는 나뭇잎처럼 그저 둥둥 떠가는 기분이 드니까. 그래서 이렇게 12월의 기록이나마 모아보기 시작했다. 앞선 열한 달을 그냥 보냈다는 허망한 기분을, 마지막 한 달만이라도 매일 같이 기록하고 나면 왠지 조금 달랠 수 있을 것 같아서.
어제 못 잔 잠이 오늘 쏟아진다. 12시 하고도 35분이니까 이만 자도 괜찮겠지, 또 밤이 구남친처럼 새벽 두 시쯤 “자니?” 하며 구질구질하게 깨우진 않겠지. "너 예전엔 밤늦게까지 나와 보냈잖아" 하며 애처럼 보채진 않겠지. 부디 오늘 밤은 아침까지 깨지 않고 내리 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