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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hyang Eun Dec 27. 2018

2018년 12월 4일 화요일의 일

전동드릴을 빌려 블라인드를 달았다

2018 12 4일 화요일지


철물점 하는 Y 씨에게 전동드릴을 빌려서 블라인드를 달았다. 이전 집에 살 때 처음 블라인드라는 걸 사서 달아봤는데 그땐 사무실에 전동드릴이 항상 있어서 그걸 빌렸었다. 그때만 해도 혼자서 블라인드를 달고 나서 너무 뿌듯한 나머지 앞으로 전동드릴만 있으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생겨서 전동드릴을 하나 살까 하다 말았다. 다행히도 그때 블라인드 달고, 이번에 2년 만에 다시 똑같은 블라인드를 달 때 빼고는 딱히 필요한 일이 없어서 안 사길 잘했다 싶다.


이전에 살던 집은 햇볕도 햇볕이지만 무엇보다 건너편에 사는 분들과 눈 마주치는 일이 많아서 블라인드가 꼭 필요했는데, 지금 집은 그렇진 않다. 슬프게도 햇볕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잘 드는 편도 아니라 블라인드 괜히 가져왔나, 하고 방치했다가 최근에 날씨가 추워지면서 방한용으로 달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마저도 나 스스로 해낸 생각은 아니고, 같이 건강검진 받으려고 우리 집에 다녀갔던 엄마가 커튼이나 블라인드를 달면 어떠냐고 얘기해서 그때, 아 그러면 되겠구나 싶었다.


잠잘 땐 이불속에 쏙 들어가 전기장판 켜면 되니까 블라인드는 주방 겸 거실에 달려고 했다. 식탁을 산 후로 진정한 '키친테이블라이팅'을 실천하고 있던 중이었다. 전엔 소파에 앉아서 한창 하다 보면 허리가 너무 아팠고, 침대에서 거의 누운 자세로 하다 보면 결국 누워버리곤 했는데, 식탁이 생기니 정말 식탁에서 많은 일을 하게 됐었다. 그런데 날이 추워지고 난 후로 거실 창이 커서 그런지 식탁에 앉아 있으면 찬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거실에 달려고 꺼내 본 기억 속 블라인드는 하지만 거실 창보다 길이가 훨씬 짧았다. 하는 수 없이 이전 집에서와 똑같이 안방에 두 개, 옷방에 한 개를 달았다. 이 집에 이사 와서 창을 여닫으면서, 이전 집과 지금 집은 같은 사람이 지었거나 같은 해에 지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창이며 잠금장치 모두 꼭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블라인드를 달아보니 정말 그랬다. 아무리 집이라는 건축물과 공간이 어느 정도 규격화돼있다지만 창문 크기가 이렇게 같을 수가 있을까. 그 덕분에 예전 집에 맞춰 주문한 블라인드를 여기서도 쓸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총 세 개의 블라인드를 다는 데 필요한 브라켓(블라인드를 똑딱 걸어 지지하는)은 여섯 개, 브라켓을 고정하는 데 쓰는 나사도 여섯 개였다. 전동드릴로 드르르륵 나사 여섯 개만 돌려 박으면 블라인드를 달 수 있다. 약 2년 2개월 만에 블라인드를 다시 다는 거라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참을 이리저리 살폈다. 고정할 방향을 확인하려고 브라켓을 시험 삼아 끼웠다가 잘못 끼우는 바람에 다시 빼내느라고 엄청나게 애를 먹었다. 제대로 꽂았다면 똑딱하고 빠졌어야 하는데, 잘못 꽂았기 때문에 몇 배의 힘을 들여서, 거의 부러뜨릴 각오로 다시 빼내야 했다.


블라인드를 직접 달 수 있느냐가 마느냐가 마치 내가 얼마나 혼자서도 필요한 건 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가 하는 잣대처럼 느껴져서 처음 달고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반대로, 한 번 해봤으니 두 번째는 더 쉽겠지 하고 덤볐는데 막상 잘못 끼운 브라켓이 어떻게 해도 빠지지가 않을 때는 순간이지만 꽤 큰 좌절을 맛봤다. 결국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나, 새로 사야 하나 그랬더랬다.


힘들게 빼낸 브라켓의 올바른 방향을 다시 확인하고, 블라인드가 어떤 방식으로 걸려 있었더라? 기억을 되짚은 다음, 전동드릴로 나사를 고정했다. 처음엔 어? 하는 사이 순식간에 나사가 고정됐다. 오래돼서 잊고 있었는데 이거 생각보다 꽤 쉬운 거였잖아 하며 금세 자신감을 회복했다. 하지만 두 번째 나사에 드릴을 맞춰 대고 버튼을 눌렀을 땐 처음처럼 단번에 고정되지 않고 나사가 자꾸만 미끄러져 떨어졌다.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하니 자신감은 다시 떨어졌고 머리 높이로 오래 쳐들고 있었던 팔은 부들부들 떨려왔다. 결국 겨우 나사 하나 고정하고 나서 입고 있던 옷도 하나 벗어던져야 했다. 다행히 더는 그러지 않아도 됐지만.


기껏 블라인드 몇 개 다는 잠깐 동안 희로애락을 다 느낀 후에야 벽 바깥, 창 너머의 차가운 공기를 차단하는 기분으로, 설치한 블라인드를 끝까지 내리며, 또 이렇게 혼자서 블라인드를 달았구나. 해냈다는 뿌듯함과 함께 나는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블라인드(든 커튼이든)를 스스로 달고 떼게 될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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