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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hyang Eun Dec 28. 2018

2018년 12월 5일 수요일의 일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J를 만났다.

2018 12 5일 수요일지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J를 만났다. J를 만났기 때문에 J와 함께 저녁을 먹으려고 회사 앞에 L도 잠깐 얼굴을 봤다. J는 L의 아내다. L은, 옛 남자친구의 친구로 알게 돼 지금까지 친구로 지낸다. L을 비롯한 옛 남자친구의 친구들은 자주 만나는 건 아니지만 때가 되면 얼굴 보고 일 있으면 만나고, 평소엔 오래된 단톡방에서 시시콜콜 대화를 나누는 사이다. J와는, 예전 회사가 지금 회사로 인수되면서 같은 회사에 다니게 됐다. 지금 회사로 출근한 지 일 년 정도 됐는데 둘이 같이 밥 먹은 건 두 번 정도인 것 같고, 회사에서 우연히 마주친 건 거의 처음인 것 같다. 알고 보니 바로 위아래층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거의 보질 못한 거다. 하긴 나는 요즘 거의 사무실과 회의실 외에 별로 다니질 않는다. 밖으로 점심 먹으러 나가는 일도 드물고, 다른 층으로 커피 마시러 가는 일도 드물다. 


J를 만났을 땐 나 혼자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었는데, J도 혼자 탔다. 좁은 공간에서 예상치 못하게 마주치니까 더 반가웠다. 우리가 절친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오랜만에 만나도 별로 어색하지 않고 만나면 별별 얘기 다 할 수 있을 정도로 편하다. 좀 이상하다. 나는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다. 어떤 자리에서는 아예 입을 꾹 다무는 형태로 낯을 가리지만, 또 어떤 자리에서는 조잘조잘 말은 하지만 그 자리에서 해야 할 것 같은 말만 하고 그 이상은 하지 않는 방식으로 낯을 가리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내가 낯가린다고 하면 코웃음을 치기도 하지만 가린다, 낯. 지금은 친하게 지내는 스쿼시 함께 치는 몇몇 친구들과도 안녕하세요, 수고하셨습니다 외의 이야기를 나누기까지 거의 일 년 가까이 걸렸다. 그런데 옛 남자친구를 통해 만난 이 친구들과는 이상하게 편했다.


이런 경험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헤어진 연인을, 그의 친구들을 계속 만나는 걸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겪어보니 이 또한 너무 자연스럽고 또 자연스러워서 그들을 만나지 않는다는 걸 상상하기 어려워졌다. 아이슬란드와 스페인 여행도 이들 중 몇몇과 함께 갔고, 가장 긴박하게 도움이 필요할 때 생각지도 못한 너무 큰 도움을 받기도 했다. 우린 앞으로도 여전히 일 년에 한두 번쯤, 혹은 서너 번쯤 만나겠지만 아마 당분간은 계속 만나게 되지 않을까.


회사 앞에서 그렇게 우연히 만난 L과 J가 맛있는 돈가스를 먹으러 간다고 함께 가자고 했다. 그들이 “맛있는 돈가스”라고 했다면 그건 정말 맛있는 돈가스다. L은 몇 년 전부터 잠실에서 '콩당콩당'이란 귀여운 이름의, 하지만 매우 단정하고 정갈한 공간에서, 맛과 향은 더 깊고 더 빼어난 로스터리 카페 겸 커피 클래스를 운영하고 있고, J는 인스타그램에서 @zipbabilgi라는 계정을 운영하며 정말로 집에서 해먹은 밥 사진을 올리는데 사진에서도 집밥 맛이 나는 것 같다. 하지만 수요일은 스쿼시 가는 날이고, 이제 스쿼시를 빠진다는 것은 웬만해선 상상하기 어려운 루틴이 돼버려서 아쉽지만 다음에 보기로 하고 정자역까지 차만 얻어 탔다. (스쿼시, 대체 뭘까.) J와는 마침 다음 주 수요일 점심이 약속돼 있었고, L은 비록 시간 맞추기 어려워 자주 못 가지만(콩당콩당은 커피 클래스와 로스팅 때문에 화요일부터 토요일 12시 반에서 오후 3시 반까지만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콩당콩당에 가면 만날 수 있으니까, 하는 마음으로. (스쿼시, 대체 뭘까.)


그렇게 두 사람과 헤어진 후 집으로 오는 지하철에서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을 마저 읽었다. 치앙마이 여행 갈 때 가져가 읽기 시작했는데, 그 사이 다른 책 읽느라, 온전히 이 책에만 집중해 읽진 못해서인지 한 권을 다 읽는 데 꽤 오래 걸렸다. 요즘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이상 오롯이 책 읽는 데 써지질 않는 것도 이유다. 여러 메신저-슬랙, 라인, 사내 메신저 등 무려 3개-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업무 메시지를 받고, 메시지가 왔다는 걸 알게 되면 더는 책에 집중할 수 없게 되니까.


책 뒤쪽에 실은 제임스 조이스 생애와 작품에 대한 평까지 보고 나니, 나중에 발표된 [율리시스]의 명성과 작품성 때문인지 [더블린 사람들]은 사람들이 평가하기 좀 혼란스러워하는 책인 것 같았다. 유명하고 훌륭한 사람이 썼고, 작가 스스로도 뭔가 이러저러한 의도를 담았다고 하니까 그렇게 읽어야 할 것 같은 부담을 느끼지만, 막상 읽었을 때 내가 뭘 읽은 건지, 어떤 건 이것도 소설이라 부를 수 있는지 헷갈리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왜냐면 내가 그랬으니까. 어떤 이야기는 끝내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웠고 어떤 이야기는 흥미로웠지만 전개는 다소 지루하거나 그랬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인물과 시대상이 굉장히 생생하게 드러나 있어서 실제로 그 시대를 관찰하고 구경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게 [더블린 사람들]의 매력이었다. 과거를 자세히 보여주는 현미경 같은 것으로 그 시대 더블린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지나간 시대나 공간을 상세히 보여주는 방식으로 가구나 소품 등 그 시대의 공간을 충실히 묘사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제임스 조이스는 사람들의 대화와 행동을 통해 시대상을 드러낸다. 어떤 행동이나 대화는 너무 평범해서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적어도 누군가는 실제로 생활의 대부분을 그렇게 살고 말하고 먹고 생활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인물들, 대화들, 상황들. 덕분에 아주 오래전을 배경으로 하는데도 굉장히 모던한 소설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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