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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hyang Eun Jan 01. 2019

2018년 12월 8일 토요일의 일

최근의 나를 사로잡았던 감정이 다시 사그라들었다

2018년 12월 8일 토요일지


최근의 나를 사로잡았던 감정이 다시 사그라들었다. 나는 도망치는 사람이다.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는 이렇게 나 자신을, 나의 이해를 초과하는 사랑을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의 소설을 인용해 “죽음을 가져오는 병La Maladie de la mort”이라 부른다. 사랑에 빠진 자는 “항상 미리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전투”를 벌인다는 것이다. 죽음이 삶의 시간에 적힐 수 없듯, 사랑 역시 “삶의 과정에 포함될 수 없는 과도한 삶‘이 된다.” (다제이, 퀴어인문잡지 <삐라> 02호 ‘죽음’ 서문에서)


나는 “나의 이해를 초과하는 사랑”을 바라면서도, 막상 “죽음을 가져오는 병”에는 걸리고 싶지 않아 하는, 도망치는 사람이다.


살아남고자 하는 내 본능은 너무 강력해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기 전에 마치 가지 치듯 감정을 쳐낸다. 막상 그런 감정에 사로잡히기 시작했을 때는 장작을 넣어가며 불을 피우다가 불길이 어느 정도 커졌다 싶으면 쫓기듯 물을 퍼부어 황급히 불을 꺼 버린다. 대신 완전히는 끄지 않는다. 불씨를 남겨둔다. 남아 있는 불씨는 뜨겁지 않고 적당히 빛난다. 남은 불씨를 어쩌면 상대방이 다시 살려줄지 모른다고 기대하다가 (상대는 그 불씨의 존재도 모르는데) 결국 저절로 꺼질 때까지 둔다.


적당히 설레는 정도로만 좋아할 수 있을 때까지 좋아하다가 조금씩 괴로워지기 시작하면 좋아해선 안 될 이유를 찾는다. 지금까진 그래선 안 될 이유를 찾기 좋은 사람들만 좋아했던 것도 같다. 그래서인지 그만두는 것도 의외로 쉬웠다. 마음을 끊어내는 게, 잘 안 될 것 같은 그 일이 내게는 의외로 그 마음을 계속하는 것보다, 그것을 상대방에게 말하는 것보다는 더 쉬웠다. 이번에도 그랬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겁쟁이가 됐을까.


좋아하는 마음을 먼저 고백해 본 건 무려 이십 년 전쯤이 마지막이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촌스러운 겁쟁이가 됐을까.


친구들은 아직도 무한한 고백의 가능성과 기회가 있는 나를 부러워 하지만, 완성되지 않는 고백은 거의 너무 유치해서 제때 바로 그 사람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철지난 노래가 되고 만다. 한때 유행은커녕 한번도 불리어 보지 못한, 아무도 불러주지 않은 노래로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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