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정체성인가
밀란 쿤데라의 [농담]을 정말 좋아한다. 너무 미묘하고 절묘한 걸 너무 미묘하고 절묘하게 표현해서 감탄을 멈추지 못하며 읽었다. 최근엔 [정체성]을 읽었는데, 요즘은 어떤 생각이 들 때마다 그렇게 생각하는 내 자신에게 몇 번이고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지 묻고 또 묻는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소설에서 샹탈이라는 여주인공은 점점 나이가 들어가며 뭇 남성들에게 더 이상 (성적으로) 매력적으로 어필하지 못하는 것을 깨닫고 슬퍼한다. 그것이 샹탈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반면, 샹탈의 (연하) 애인인 장마르크는 샹탈을 다른 (나이 더 많은) 여인과 잠시 착각했던 것을 계기로 샹탈의 정체성을 자기가 대신 고민한다? (내가 아는 샹탈, 내가 샹탈로 착각한 샹탈, 스스로 매력을 잃었다고 생각하며 슬퍼하는 샹탈 등). 장마르크는 자기객관화도 잘 한다(자신의 처지를 노숙자와 비교하는데 실제로 샹탈의 집에서 나온 그는 갈 곳이 없는 처지다). 그리고 매력을 잃었다고 느끼는 샹탈을 위로한답시고 매우 이상한 짓을 꾸민다. 기본적으로 남성 성별을 가진 작가가 여성의 심리를 잘 아는 것처럼 쓴 소설을 읽을 때 느껴지는 삐걱거림이 (나는 왜 쉽게 불쾌하다고 말하지 못하는가) 역시나 쿤데라에게서도 느껴졌다. 하지만 이렇게 느낄 때 나는 나 자신을 먼저 검열한다. 그래, 실제로 이렇게 느끼는 여자들이 있을 수 있지.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고. 그러니 쿤데라도 이런 사람에 대해 쓸 수 있는 거 아닌가? 실제로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왜 난 개운하지가 않지? 이건 나의 과민함에서 비롯되나? 아니면 내가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건가? 남자는 여자에 대해 쓰면 안 되나? 써도 되지만 너무 잘 아는 척은 좀 안 하면 좋지 않나? [정체성]이라는 제목을 붙이지만 않았다면 좀 나았을까?
‘강간당한 여자의 탄식처럼’이라니 강간이 무슨 놀이인가? ‘탄식’이라는 뜻은 알고 쓴 건가? 간강당한 여자가 (마치 어제 과음한 것을 탄식하는 여자처럼) ‘탄식’을 내뱉는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가늘게 떨리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강간당한 여자의 탄식에 비교하는 이 무심한 폭력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한 줄은 한 번쯤 무시하고 지나쳐도 되는 것인가?
마음속에 있는 답으로 가는 길을 끝없이 검열하는 이걸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