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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zarirang Feb 02. 2023

추억 팔이 속 현타~

나의 아빠는 농부셨다.

경기도 연천의 어느 하늘아래 황무지 돌밭을 개간하여 멋들어진 과수원을 일구셨다.

고된 일을 마치면 언제나 늦은 밤까지 침침한 불빛아래에서 "영농 XX"이었던가 하는 농업잡지를 꼼꼼히 읽으셨고, 가지치기를 할 즈음이면 우리 과수원으로 연천농고 학생들이 실습을 하러 왔다.

아빠는 과수나무 하나하나의 특성을 설명하며 가지 치는 법을 설명하고 학생들은 배운 데로 복숭아나무와 사과, 배 나무의 가지를 쳤다.

그때 추억 속의 나의 아빠는 멋졌다.

지금은 그시절 지게를 지고 가던  아빠의 뒷모습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련하게 저며오지만 그당시 어린 내 눈에는 멋져 보였었다.

석양이 뉘엿뉘엿 지는 논길 사이로 추수한 무언가를 잔뜩 싣고 걸어오는 아빠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한 장의 사진이 되어 내 뇌리에 깊숙이 박혀있다.

과수원집 딸로 사는 법~

긴~ 겨울이 지나면 노지의 딸기가 먼저 봄을 알렸고 그 뒤로 앵두와 토마토가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오면, 복숭아와 수박, 참외 등등 쉼 없이 우리의 배를 불렸고 포도를 먹으며 가을을 준비했고 사과와 배를 먹으며 가을을 즐겼다.

가을의 아침이면 집을 둘러싼 밤나무에서 떨어진 밤을 주어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 위에 부어놓곤 했다.


이렇게 본다면, 70년대의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어려운 시절을 참 호사롭게 산 것처럼 보인다.

그럴 수도 있겠다.

다른 또래의 친구들은 밭일도 돕고 저녁도 짓고 했지만, 우리 부모님은 그런 일들을 시키지 않았다.

기껏해야 동생들 돌보고, 밤나무에서 떨어진 밤을 주워오고, 태풍이 불어 잘 익은 복숭아가 떨어지면 비가 오든 말든 뛰어가서 한 양동이씩 주워 담아 오는 일 정도...

떨어진 복숭아가 너무 많을 땐 집에 있는 양동이마다 한가득 담아 온 동네에 배달을 해 주는 것도 우리 몫이긴 했다.

우스개 소리로 갓난아기 손도 아쉽다는 농촌 생활에서 우리 부모님의 헌신은 참으로 대단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우리 4남매에게 그 시절은 "참으로 좋았었어~ 그렇지 않니?" 하며 다시 돌아가고 싶은 추억의 한 Chapter가 되었다.

과수원집 딸이었던 내가 그 시절을 인생 전체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단언할 수 있으니 이런 호사가 또 있을까?

우리만 매번 작은 걸 주시네요?

체구가 아담한 우리 엄마의 손은 누구보다 큼직했다. 아니 지금도 그렇다.

누가 오면 바리바리 한 보따리 싸주어야 성이 찬 그런 종부다.

떨어진 복숭아도 더 상할까 봐 후둑후둑 떨어지는 빗속에서도 마을 곳곳에 배달을 해야 했고, 상품가치가 없는 가지며 오이 등 모든 먹거리들도 농사를 안 짓는 집에 가져다주셨다.

추수한 모든 먹거리들은 자루자루 넣어 광에 넣어두었다가 누군가 오면 두 손 가득 쥐어 보내곤 하셨다.

언젠가...

수확한 밤을 한 자루 넣어 주었더니...

"형님~~ 우린 맨날 작은 것만 주고... 큰 것도 좀 주소~" 했다.

(지금도 내 기억 속에 그날의 일이 '동작 그만'상태로 박제되어 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애구~ 우리도 작은 것만 먹어요~ 큰 건 내다 팔아야 우리도 먹고 살지요~"

아뭇소리 안 하고 물끄러미 철없는 종가 동생을 쳐다보는 아빠를 대신해서 옆에서 엄마가 거들었다.

어린 내 마음에도... '참~ 그렇게 온 가족이 들고 가기 힘들 정도로 싸주는데도 어쩜 저러지? 이렇게 싸주는 게 맞나?' 싶었다.


복숭아를 좋아하는 어린 나도... 아니 우리 가족도... 나무에 달린 잘 익고 잘생긴 놈을 따 먹어보지 못했다.

아침이면 참지 못하고 떨어진 것들을 이슬이 채 마르기도 전에 주어와서 하루종일 먹었으니까....

매끈한 오이로 오이소바기나 오이지를 담근 것이 서울로 이사 온 후였다는게 울 엄마의 증언이다.


그러나~~ 받는 사람 입장에선...

지들은 좋은 것만 먹고 저렇게 좋은 게 많은데 이렇게 자질구레한 것 처치곤란한 것만 싸주는구나 싶었나 보다.

같은 시절 다른 추억!

내가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당시에 고향의 과수원은 다른 사람에게 팔려 목장이 되었다.

빨간 기와집 둘레에 밤꽃이, 복숭아꽃이, 사과와 배꽃이 한 폭의 그림처럼 탄성을 자아냈었는데...

우리의 추억이 모두 팔려버린 듯이 허전함을 느꼈었다.

비단 나만의 허전함은 아니었나 보다.

언제였던가?

설이었는지 추석이었는지 모르겠다.

우린 동그랗게 모여 다시 추억팔이를 했다.

"참 이뻤어? 친구들이 다 부러워했다니까~"

"그렇지? 참 일 년 365일 과일이며 엄마가 만든 두부며, 엿이며... 정밀 실컷 먹었어~"

"언젠가... 돈 많이 벌면... 다시 사서... 우리 다 같이 모여 살까? 과수원 다시 만들고..."

우린 이렇게 즐겁게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한 마디씩 하며 하하 호호했다.


가만히 우리의 이야기를 듣던 엄마가 "난!!! 싫다~! 절대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것을 시작으로 엄마의 한 맺힌 그 시절이야기는 한동안 계속되었고 우리 4남매는 애꿎은 방바닥에 의미 없는 손그림을 그렸다.

엄마에게 그 시절 아니 과수원은...

곱디곱게 양산만 쓰고 다녔다는 스물셋의 꽃 같은 나이에 서울에서 살 거라는 아빠와 할머니의 감언이설? 에 속아(엄마주장) 황무지 같은 돌밭을 일궜으니 웬수가 따로 없고,

엄마에게 그 시절의 삶은....

종갓집 종부여서 한 달에 한두 번의 제사를 지내야 했고, 두부며, 엿이며 한과도 척척 만들 정도가 되었으며...

며느리와 사이가 안 좋다고 무작정 보자기에 옷 몇 벌 싸들고 찾아온 먼 친척이었던 키 작은 할머니와 키 큰 할머니까지 2~3년 모셔야 했고... 물론 기본으로 해 뜰 때 일어나서 해 질 때까지 쉴 새 없이 일을 했으니...

엄마에게 그 시절은 악몽이었으리라....

엄마도 그러하니... 그 모든 것을 감당했을 종손이며 가장이었던 아빠의 삶은 어떠했을까?

현타 오다!

어제...

한국티브이를 보다가 '현타'라는 말이 나오니까 남편이 물었다.

"현타가 뭐야? 저게 맞는 한국말인가?"라고.

요즘은 하도 줄임말과 신조어가 많아서 외국에 나와 사는 우리에게 어떤 말은 마치 외계어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내가 아는 대로 설명을 해주고...

오늘 아침에 그 생각이 나서 네이버 검색까지 해봤다.

'현타=현실 자각타임

헛된 꿈이나 망상 따위에 빠져 있다가 자기가 처한 현제 상황을 깨닫게 되는 시간'

여기저기 블로그까지 찾아보면서 현타에 대해 읽어 보는 순간 갑자기 '같은 시절 다른 추억'이 떠올랐다.

애꿎은 방바닥에 헛손질로 그림을 그리던 그때 우리 남매에게 현타가 왔던 거란 걸...


이제는 동생이 큰소리치며 약속했던 것처럼 고향집을 사서 다 같이 모여 살지는 못할 거란 사실을 잘 안다.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으니...

헛된 꿈이고 망상일 망정, 분명 현타가 오겠지만 오늘은 그냥 고향 쪽 하늘을 바라보며 추억팔이하고 싶다.


이렇게 멋진 추억의 한 Chapter를 만들어준 나의 부모님께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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