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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zarirang Dec 18. 2019

나는 농부의 딸이다

호박 결혼시키기

한국이 겨울이 익어가면, 뉴질랜드에선 여름이 익어간다.

유독 들쭉날쭉한 날씨를 자랑하는 이곳 크라이스트처치의 올해 여름은 텃밭꾼의 입장에선 야속하기 그지없다.

풍성하게 자랐어야 할 깻잎조차 삼겹살 파티를 주춤하게 만들 정도로 30센티도 못 자라서, 지켜보는 텃밭꾼의 마음을 안쓰럽게 만들고 있다.

나는 농부의 딸이다

친정아버지는 농부셨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농부다.

서울로 이주를 해서 지금은 부천 어디 즈음에 사시는 아버지는 산자락에 혼자 만들었다고 믿기 어려운 멋들어진 텃밭을 가꾸며 농부로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친정집 3층 옥상에 있던 쓸모없어진 물탱크를 어떻게 그 산자락까지 옮겼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비가 오면 지붕으로 떨어진 빗물은 모두 물탱크 안으로 흘러들어 가서, 수도가 연결되어 있지 않은 텃밭의 귀한 용수로써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팔순이 넘은 친정아버지의 지혜가 빛을 발한 멋진 발명품이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쓰러져 가는 집은 아버지만의 아지트로 바뀌었고 벽을 빙빙 둘러 가지런히 걸어놓은 많은 농기구들이 아직은 팔팔한 농부라고 입을 모아 증언하고 있다.

지붕 위로는 운치까지 덤으로 입은 호박 덩굴이 휘감겨 있고...


3년 전 십 년 만에 한국을 방문해서 친정에 짐을 풀자마자 아버지와 텃밭으로 향했다.

그날 내가 본 아버지의 텃밭은 지금도 내 머릿속에 한 폭의 그림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냥 그 그림만 떠올리면 눈물이 난다.


호박 시집보내는 날의 추억

어린 시절...

나는 서울과 경기도 연천의 본가를 오가며 자랐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5학년까지는 연천 국민학교를 다녔고...

그 시절 4년의 추억은 나의 평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40년도 더 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혼자 미소를 짓기도 하고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다.


어느 해던가?

아마도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였던 듯하다.

아침이면 산자락 아래 있던 우리 집 앞 풀숲엔 물방울들이 맺혀서 싱그러운 여름 아침을 더 싱그럽게 만들었다.

그 풀숲을 헤집고 다니다 보면 다리를 풀에 베이기도 하고 불쑥 나타난 뱀들로 놀라기 일쑤였지만 그 촉촉함이 너무 좋아서 일부로 풀숲 속으로 걷곤 했었다.

일손이 모자랐던 초여름 어느 날, 아버지는 한 살 터울의 남동생과 나를 '호박 시집보내기' 프로젝트에 아르바이트생으로 취직을 시켜주었다.

평소에는 아이들에게 농사일을 거들라고 하지 않으셨었는데 아마도 그때는 우리 손이라도 빌려야 할 만큼 바빴을 테고 그 일이 우리에게 안성맞춤이었기에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일은 아주 간단했다.

활짝 핀 호박꽃 중에 열매가 안 달린 호박꽃을 따서 꽃잎은 떼어 버리고 그 꽃술에 묻은 노란 분을 아기 호박이 달린 호박 꽃술에 살짝  묻혀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야 열매가 이쁘게 잘 큰다는 것이 아버지의 설명이었고...

물론 벌들이 중매쟁이 역할을 했지만, 간혹 꼼꼼하지 않은 중매쟁이들이 있어서 상품성이 없는 호박이 열리곤 했다.

며칠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훗날 내가 이날의 이야기를 꺼내 놓으면 아버지는 딱 한번 시킨 것을 오래도 기억한다고 멋쩍어하신다.

아마도 학교 가기 전에 일찍 깨워서 일을 시킨 것이 마음에 걸리신 모양이지만, 나에겐 아름다운 추억이다.

커다란 호박잎 속을 들추며 꼼꼼한 중매쟁이를 했던 그날의 공기 내음, 발을 촉촉하게 적셨던 이슬방울, 간혹 중매쟁이 직업을 잃은 벌들의 성남 때문에 화들짝 놀랐던 일까지도 모두 나에겐 잊히지 않는 소중한 추억이다.


오늘 아침 거실 커튼을 치며 텃밭을 보니, 호박꽃이 여러 개가 활짝 피어있었다.

"어머~ 호박 시집을 보내야겠네~"했더니, 남편은 "뭔 소리야? 뭘 해?"하고 반문했다.

간단히 설명을 하고 나는 부지런히 텃밭으로 나갔다.

한번 휘~~ 둘러보고 호박 수꽃 하나를 따서 서너 개의 아기 호박이 달린 호박꽃에 중매쟁이 노릇을 했다.

울 딸들과 손자에게도 특별한 추억을 심어주고 싶다

나는 지금도 오이의 향을 맡으면 타임머신을 타고 행복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곤 한다.

갓 따서 입에 넣어야만 알 수 있는 특유의 오이향이 있다.

애 호박을 길쭉하게 4등분을 해서 쪄서 양념간장을 숟가락으로 떠서 찐 애호박에 뿌리고 한 숟가락 잘라먹는 맛을 아마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강남 한복판에 살던 시절... 할아버지는 아파트를 지으려고 방치해둔 남의 땅에 호박과 채소를 종류대로 심었다. 나중에 땅의 사용권인지 뭔지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쓰고서...

처음 인사를 온 남편을 위해 할아버지는 손수 농사를 지은 갖가지 야채를 따오셨고, 엄마는 우리가 좋아하는 애호박을 쪄서 반찬으로 내놓았다.

그때의 남편의 표정이라니.... 생전 그런 반찬은 첨으로 본 모양이었다. 나를 한번 흘깃 보더니... "이게 뭐야?" 하는 얼굴이었으니까... 내가 먹는 시범까지 보였지만, 남편은 딱 한입을 먹고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 후에 결혼을 해서 애호박을 사다가 쪘더니... 남편은... "그땐 내가 말을 안 했지만, 이게 반찬야??? 이렇게도 먹어???"라고 했었다. 


추억이라는 것이 그렇다.

프로그램처럼 억지로 짜 넣을 수도 없는 것이다.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추억이 되기도 하고 낯섦이 되기도 하고...

지금도 나는 찐 애호박에 양념간장을 찍어 먹으면 행복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 버리지만...

남편에겐 손이 가지 않는 밥상의 애물단지일 뿐이다.


나의 딸들과 손주에게 나처럼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다.

그래서 더 텃밭에 매달리는지도 모른다.

딸기도 사는 딸기는 텁텁함이 있어 아이스크림과 곁들여 먹지만, 내가 키운 텃밭 딸기에는 보드랍고 향내가 난다.

딸들도 손자도 나의 텃밭 딸기엔 멈출 수 없는 손동작을 보이니까... 감히 아이스크림은 범접하지 못한다.

갓 따온 오이도 딸들은 초고추장까지 찍어서 먹는다. 한국 오이씨가 이젠 없어서 내년이 걱정이라고 하면 딸들은 바로 인터넷을 검색해 본다. 어떻게 공수를 해올지를 고민하면서... 

애호박은 전을 부쳐 놓으면 게눈 감추듯한다. 물론 손주까지도...


훗날 나의 딸들과 손주는 오이를 보면, 딸기를 보면 그리고 호박을 보면 나의 텃밭에 대한 추억으로 미소 짓지 않을까 싶다.



나에겐 농부의 피가 흐른다

작은 텃밭꾼이지만, 나에겐 농부의 피가 흐른다.

호박꽃에 관심이 가고, 올망졸망 달린 오이가 너무 이쁘고...

너무 많이 달린 사과나무를 보노라면, 열매를 솎아주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

하나둘 심기 시작한 과일나무도 7종류가 되고 한두 포기씩 심은 야채들은 수도 없다.

땅이 없으면 스트로폴이나 화분에도 심어놨으니까...

남편은 "역시 피는 못 속여~"라고 한다.

그렇다.

나는 농부의 딸이다. 나에겐 농부의 피가 흐른다.

태평양 건너 부천 어느 산자락 아래서 텃밭을 일구는 어느 농부가 오늘따라 너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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