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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zarirang Jan 15. 2020

2017년의 기억

10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다

2017년 10월의 어느 날 나는 10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을 못 간 그 10년의 세월 동안 많은 일들을 겪었다.

시부모님과 남편의 형제들은 대부분 이곳 뉴질랜드에 살고 있었고 나의 친정은 모두 한국 어느 하늘 아래 있다.

시아버님의 직장암 수술 후에 후유증으로 병원을 자주 들어가시기도 했고, 크라이스트처치의 지진도 겪었으며 딸들이 안정된 자기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기까지 우여곡절도 겪으면서 한해 두 해가 그렇게 흘렀다.

새해가 되면 올해는 꼭 한국에 잠깐이라도 가보자고 하면서도 쉽사리 비행기표를 예매하지는 못했다. 혹시 우리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우리의 발길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수백 가지의 가야 하는 이유

과장을 좀 해서 내가 한국에 가야 하는 이유는 수백 가지도 넘었다.

이놈의 이빨들이 말썽이어서 가야 하고...

머리까지도 한국에 가서 자르고 싶고...

평생 한 번도 안 해본 정밀검사라는 것도 받아보고 싶고...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은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그럼 왜 가고 싶었냐고?

그 대답은 차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그냥 나의 엄마 아빠가 그리고 내 핏줄이 보고 싶다고 말하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에...

어느 해인가...

올해는 꼭 가보자고 했는데...

시아버님이 뇌에 물이 차서 수술을 하게 되었고 그 후에는 거의 앉고 일어서는 것이 힘들게 되었다.

혹여 우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겁이 나서 그냥 주저앉았다.

그렇게 세월이 또 흘렀다.

2017년 10월...

그 사이 큰딸은 결혼을 했고, 쌍둥이 두 딸들은 회사를 다니게 되었다.

함께 살고 있던 두 딸들은 이곳은 자기들이 책임을 질 테니 걱정 말고 한국에 갔다 오라고 했고 남편도 더 이상 미루기가 미안했는지 10월로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이제 몇 달 후면 한국에 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은 분주했지만, 막상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막연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한국 방문으로 들떠 있을 즈음에 남편의 건강에 살짝 문제가 생겼다.

치질도 아니고 치열이라고...

아픔의 강도가 굉장하다는 게 의사들의 표현이었다.

남편은 치열의 고통으로 응급실까지 실려갔고 마약류의 진통제까지 먹어야 했다.

참 기분이 묘했다.

남편의 아픔이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나의 한국행이 염려스러웠으니까...

천만다행으로 10월경에는 비행기를 탈 정도로 안정이 되어서 먹는 약과 바르는 약 등을 잔뜩 싸가지고 10년 만에 한국으로 떠났다.

10년 만에 만난 부모님 그리고 동생들...

공항에서 만난 한 살 터울 남동생은 세월을 비껴가지 못했고 올케는 여전히 이뻤다.

동생의 반백의 곱슬곱슬한 긴 머리는(남자치고는 길었다) 멋진 한량끼를 대변해 주고 있었다.

헤어질 때는 40대였던 이들을 50대의 얼굴로 마주하고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고, 초등학생 때 봤던 조카들은 모두 고등학생, 대학생들로 변신해 있었다.

더욱이~

나와 띠동갑인 극동안을 자랑하던 엄마는 어느새 70대 후반이 되었고...
엄격하던 아빠는 팔순이 넘은 인자한 할아버지가 되어있었다.

30대 초에 이민을 온 큰딸이 그리워 매일 밤 우셨다는 두 분이었는데 칠순잔치에도 팔순잔치에도 할머니 장례식에도 한번 와보지 못했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그때마다 이곳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질 못하게 나를 붙드는 일이 생겼었다.

참 인생이 우습지 않은가?

나는 그냥 뭔지 억울해서 서러운 눈물만 삼켜야 했다.

그림의 떡~

한창 그동안의 못다 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무렵 남편이 슬며시 방으로 들어가더니 잠이 들어버렸다.

동생들은 "이제 나이가 들었나 봐~, 옛날 같지 않아~" 하며 한 마디씩 했다.

그다음 날은... 한국에 사는 유일한 남편의 누나 댁에 가기로 하고 지하철을 3번이나 갈아타고 가는데 중간에 더 이상 걷지 못하겠다고 해서 걷다 쉬다를 반복하며 겨우 시누 댁에 도착해서는 거의 초주검이 되어버렸다.

치열이 재발하면 어쩌지? 하는 염려가 더 병을 키운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날부터 다시 돌아오는 날까지 남편은 약을 먹어가며 버텨야 했다.

혹여 10년 만에 친정 나드리를 한 마누라 심기를 건드릴까 노심초사하며 먹는 것까지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한국에서 좋아하는 음식 실 것 먹고 간다고 들떠있었는데...

자장면도 붕어빵도 종류도 다양한 남편이 좋아하는 빵들도 그저 그림의 떡이었다.

부모님과 한 달간의 동고동락~

치과를 갔지만, 그냥 살살 사용하다가 뉴질랜드에서 하라는 정직한 치과의사의 소견만 듣고 돌아왔다.

남들은 한 달 만에 인프란트까지 하고 왔다는데, 이 정직한 의사샘은 치과 치료를 그렇게 하면 큰일 난다고 손사래를 쳤다.

정기검진도 물 건너갔다.

여기저기 알아만 보다가 1박 2일이라는 검진 스케줄이 엄두가 안 났는지 남편은 다음 기회에~라고 했다.

그래도 머리는 자르고 파마까지 했다.

그런데... 남들은 한국에 갔다 오기만 하면 다들 어딘지 이뻐져서 돌아왔는데... 나는 7080이 되어서 모두를 웃게 만들었다.

왜냐고?

지금 생각해도 배꼽이 꿈틀거린다.

팔순 엄마와 손잡고... 팔순 엄마의 단골인 육순이 훌쩍 넘은 미용사에게 파마를 했으니...

여동생과 올케가 내 모습을 보더니... "언니~ 이건 회복이 힘들어 그냥 묵고 다녀~" 했다.

팔순이 가까운 엄마만 "이쁜데 괜히 들 난리야~"라고 했고...

남편은 그냥~ 다시 좀 자르면 안 되냐고 했다...


그렇게 10년 만에 간 한국 방문은...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남긴 채 4주가 후~딱 지나갔다.

남양주의 남동생네와 일산의 시외삼촌댁 그리고 시누 언니네와 남한산성을 돌고 남대문시장에 가서 구경을 한 것이 거의 전부였다. 물론 쉬엄쉬엄 다녔고 멀리 가는 곳은 자가용이 우리를 데리러 오기까지 했다.

다들 바쁜데도 10년 만에 온 우리를 위한 배려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친정집 뒤편 산책로를 걸으며 운동을 했고,

동네 재래시장을 다니며 구경을 하고 이마트에 가서 가져 올 물건들을 사고...


남편은 언제 이렇게 부모님과 한집에서 살아보겠냐고 했다.

정말 그 말은 맞았다.

20대 중반에 결혼을 한 후에 처음으로 4주 동안이나 부모님과 함께 산 셈이 되었으니까...

그 시간들이 참 소중했다.

그때부터였던 듯하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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