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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zarirang Jan 21. 2020

우리는 서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오늘도 나는 주저리주저리 글을 쓴다.

25년의 타향살이는 이제 맞춤법도 가물거리고 흔하게 쓰던 단어도 머리에서 맴돌 때가 많다.

그 옛날 우리 할아버지의 치부책을 암호 해독하듯이 읽던 적이 있었다.

'쪼끄빠이' '쁘츠씨'...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슬며시 내 곁에 와서 서 계신 할아버지가 치부책을 내 손에서 가져가시며 "글씨가 이상하나?" 물으시곤 겨면쩍게 치부책을 닫으셨던 그때가 떠오른다.

경동시장을 가시면서 사 올 물건을 쓰셨던 것 같은데...'초코파이'와 '부추씨'... 였었다.

그 시절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나는 슬며시 나 자신을 본다.

'뭐가 다르지? '싶다.

맞춤법 검색이 없다면 나의 졸필을 읽는 분들이 고개를 갸웃거릴 테니...

소통과 불통의 차이

사실 나는 할아버지가 쓰신 그 단어들을 거의 읽을 수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함께 살아온 우리 사이여서 척하면 척하고 통했다.

할아버지와 나는 소통이 되는 셈이었다.

3대가 살던 우리 집안은 그렇게 서로 소통을 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2017년 부모님과 한 달을 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그 한 달은 나의 생각을 뒤흔들어 놓았다.

어쩌면 우리는 한쪽에서 '단풍~'하면 다른 쪽에선 '다단풍'하며 살지는 않았을까?

바쁘다는 핑계로 서로 허공에 대고 모든 말들을 쏟아내고 살지는 않았을까?

귀찮다는 핑계로 귀를 닫고 살지는 않았을까?

소통과 불통의 차이는 내가 주인되어 산 삶의 댓가였다.

네버엔딩 도도리 표~

엄마와의 한 달이 어땠냐고 물으신다면.... 딱 한마디로 무어라 표현하기 힘들다.

한국에 도착해서 다음날 아침에 엄마와 마주 앉았다.

이때다 싶었는지 엄마는 그동안의 삶을 풀어냈다. 내가 아는 것도 있었고 처음 듣는 것도 있었다.

그 내용은 이제 막이 내려 추억의 뒤안길이 되어버린 시집살이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엄마는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치 처음하는 이야기를 하는 듯 어제한 그 이야기를 다시 풀어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음에도 엄마의 악보에는 끝이 없는 도도리 표가 계속되고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아마도 내가 한국에 계속 살았었다면... 인내심 없는 성격에 "엄마~ 이제 그만해!!! 다 지난 일인데 뭘 그렇게 아직까지 가슴에 담아두고 있어!!!!"하고 퉁명스럽게 반응 했을 것 같다.

나는 10년 만에 온 죄인이었기에 그냥 10년치라고 생각하고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심 '혹시~ 초기 치매가 온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매일 똑같은 말을 하고 있지? 잘 지켜봐야겠네~'라는 근심 어린 생각에 잡혀있었다.

왜 나는 몰랐을까? 엄마의 한을...

일주일이 지났다.

아침부터 엄마는 마치 녹음된 테이프가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뻔한 스토리를 때로는 울분을 토하고 때로는 눈물을 훔치면서 나에게 쏟아부었다.

나도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어서...

"그러게 말야~~ 어떻게 할머니는 그럴 수가 있어~ 너무 했네..."

"어머... 정말 작은집이 좀 심했네... 너무 자기들 생각만 한 거 아냐??"

"정말? 그 집사람들 왜 그랬데? 엄마도 참 착했네~ 나 같으면 그냥 받아버렸을 거야~"

하며 엄마의 아야기에 추임새를 넣기 시작했다.

엄마는... 큰딸의 역성에 감정이 복받쳤는지 갑자기 서러운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런 엄마의 모습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랬구나... 엄마는 그저 누군가가 서러운 엄마의 일생을 공감해 주기를 바랬구나... 단지 그거였구나~ '

그냥 들어만 주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엄마의 그 한을 공감해주길 바랬던 것이었다.

'딸이라는 것이... 같은 엄마의 일생을 살면서 이제야 이걸 알다니...'

그날 이후에 엄마의 한마디 한마디를 곱씹으며 들었고 격하게 공감을 했다.

그럼에도 엄마의 도도리 표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네버엔딩이었다.

어찌 꽃다운 스믈셋에 시집와서 일흔이 훌쩍 넘을 때까지 겪은 그 한 맺힌 시집살이가 한 달의 한풀이로 끝날수 있겠는가?

엄마의 일생~

그랬다.

엄마는 22살 크리스마스이브에 결혼을 해서 24살에 띠동갑인 나를 낳았다.

서울에 집이 있다는 중매꾼의 말을 믿고 허여멀겋고 멀끔하게 생긴 눈웃음을 살살 치는 아빠와 결혼했단다. 막상 결혼을 하고 보니 서울 집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사시고 엄마와 아빠는 엄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 쓰러져가는 집에 끝도 없는 돌밭이 있는 시골에 남겨졌다고... 그때부터 양산만 쓰고 손에 물도 안 묻히고 곱게 살던 막내딸이었던 엄마는 맨손으로 돌밭을 일구어 과수원을 만들었고, 7대 장손이라는 아버지의 그 많은 제사를 지냈으며, 먼 친척이라는 팔순이 넘은 두 할머니들까지 몇 년을 모시기도 하며 그렇게 살았다.

내게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은 그 시골 생활이 엄마에겐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장편 인간극장이었던 거다.

'나는 엄마를 얼마나 아는 것일까?' 하는 철없는 물음이 오십이 넘어 할머니가 된 지금에서야 든다는 것이 나도 참 모자라는구나 자책했다.

아마도 엄마의 호탕하고 쾌활한 성격 탓에 간혹 내밷는 푸념이 묻힌 것은 아닐까도 싶었고 나의 무디고 무심한 성격이 엄마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때, 인생의 회환이 들었을 그때! 그냥 엄마를 살며시 안아주었어야 했는데...

억장이 무너졌을 그때! 그냥 엄마의 손을 잡아주었어야 했는데...

그런 저런 후회와 자책을 뒤로하고 나는 돌아오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이런 모든 설움을 품고, 흐르는 시간이 잠시 정체된 듯이 내게 다가왔다.

그럼 내 딸들은?

1995년에 이민을 왔다.

힘들게 산 세월은 아니지만, 어느 목사님의 설교에서 처럼 전쟁 피난민 다음으로 힘들다는 이민생활을 해 오고 있다. 외국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나와 남편이 태평양을 건너 이곳에서 둥지를 틀 줄은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한 일이었는데... 어찌어찌 살다 보니 나는 지금 이곳에 이렇게 살고 있다.

간혹 나는 우리 딸들에게 책상 서랍 속에 있던 추억을 하나씩 꺼내 놓곤 한다.

딸들의 반응은?

5살에 함께 이민을 온 딸도 이곳에서 태어난 딸들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모두 생경스럽게 엄마를 쳐다본다.

언어가 달랐던 나와 영어가 모국어인 딸들...

문화가 낯설었던 나와 이곳 문화가 몸에 베인 딸들...

우리는 한 지붕 아래 두 언어와 두 문화를 가지고 살고 있었던 거다.

당연히 나의 설움은 딸들에겐 고개를 갸웃거리고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것으로 마무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이고...

다행히도 우리 딸들하고는 한국어로 마음속 깊은 이야기까지 가능하고 한국문화의 감성을 어느 정도는 공감해 주는 딸들이다. 그래서 20살만 넘으면 분가를 해버리는 이곳 문화 속에서도 부모와 함께 살면서 눈과 귀가 되어주는 고마운 딸들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얇은 막은 존재한다.

나의 엄마와 내가 언어가 달라서 문화가 달라서 그랬겠는가?

한 공간에 살지만 다른 세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마치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처럼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닐까?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나는 그 후에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뉴질랜드 이민과 교육 이야기"라는 글을...

연재를 하다 보니 딸들과 이런저런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혹시 딸들이 문화적 이질감으로 인해 받았을 상처들에 대한 엄마로서 변명할 기회가 되기도 해서 참 좋았다.

딸들과의 소통을 위해 페이스북도 트위터도 인스터그램도 하는 나다.

딸들이 엄마의 레시피가 궁금하다고 해서 블로그에 요리 레시피를 올리고 있던 중이었는데 한국에 다녀온 후에는 나의 이민기 아니 우리가 함께 한 같은듯 다른 삶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딸들과 소통을 하고 싶었다.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그리고 우리 딸들에게 공유를 한다.

왜냐고? 불통은 너무 서러운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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