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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인제주 Sep 27. 2018

빨래를 개다가

제주도 시골 민박집 주인장의 일상 이야기 (01)




이 날도 이번 여름 대부분의 날들처럼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흐르는 무더운 날씨였다. 에어컨 바람이 휭휭 나오는 거실에 털썩 앉아 언제나처럼 스피커로 음악을 틀었다. 카펜터스의 노래는 마치 초식동물 같다. 눈이 동그랗고 다리가 길고 털이 보드라운, 세상 어디에도 무해(無害)할 것 같은.


청소는 거의 마무리가 되었고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수건을 느긋하게 개는 중이다. 문득, 평화롭고 안온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얼핏 생각해서는 별다른 고민거리가 떠오르지 않는, 몸에도 마음에도 무해한 나날들. 어쩌면 멍청하고 무기력한.


장래희망이 숙박업이었냐고 물으면 그런 건 아니었지만, 열심히 공부하고 멀쩡히 다니던 회사 때려치우고는 고작 청소나 빨래하는 게 좋냐고 묻는다면 불만이 없다는 쪽이 맞습니다요. 믿을 수 없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집안일을 좋아하는 편이라 반들반들 청소를 하거나 색깔을 맞추어 빨래를 널고, 접어놓고, 물건들을 나란히 정리하는 것이 즐거운 데다, 집에 손님이 오는 것도 좋아하는지라 꺄아, 신나서 미치겠어 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일에 불만이 있을 리가 없다.


인생전반에 걸친 고민이라면야 분명 있지만 여하튼 최근의 초식동물과 같은 삶은 대체로 만족스럽다. 빨래를 개다가 괜히 쓸데없는 생각 이것저것.


네. 그렇습니다.

저 제주도 시골 민박집 주인장입니다요.


아침에 눈을 뜨면 청소와 빨래를 하고 흐린 날이면 잡초를 뽑고, 해 질 녘이면 하늘도 보고 바다도 느긋이 보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조금씩 천천히 낼모레 마흔의 나이에 짧지 않았던 회사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에 내려온 이야기와, 제주도에서의 일상과 여행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네. 뭐. 그렇다고요.


(덧) 빨래를 개다가, 라는 제목을 생각하다가 이거랑 비슷한 제목의 산문이 있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어 '빨래를 개며', '빨래를 널며', '빨래를 널다가' 뭐뭐뭐 검색하다가 간신히 생각해 냈다.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


어딘가 비슷한가. 다른가. 묘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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