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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작 Mulgogi Oct 15. 2021

아홉 살, 인생 바닥을 찍던 날

아홉 살, 인생 바닥을 찍던 날



I.

그해 여름은 더웠고

국가 대표 급으로 수영을 잘하는 

은영일 따라 처음으로 수영장엘 갔다


물속에서 자유자재로 유영하던 은영인

어린이 풀장이 영 시시한 모양이고


제 키를 훌쩍 넘는 성인 풀장에서

마치 수중 발레리나가 된 듯 보였다


반면 있어도 없어도 모를 내성적인 난

또래보다 작은 키로 어린이 풀장에서 배영을 배웠다 

 

선처럼 가만히 누워 물과 하나 되고 보니

엄마 뱃속에 있던 것처럼 편안해

    

아, 처음 맛본 자유란 너무 달콤하여라


제 실력에 지나치게 자부심을 느낀 은영이

이번엔 내게 자유형을 알려주겠노라


성인 풀장으로 성큼 이끌었을


바들바들 떨리던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고

잔뜩 겁먹은 난, 은영이의 머리채를 잡았다


저만 믿으라 한사코 괜찮다던 은영인

어느새 나를 벗어나 멀리 도망치고 있었다, 나쁜 년


아무리 허우적대도 아무도 구해주지 않는

아홉 살 인생, 믿을 사람 하나 없더라



II.     

소독 냄새 진동하는 물을 연거푸 마시며

수영장 맨 밑바닥을 수차례 찍던 날 깨달았다     


바닥을 치면 올라가요.


시린 눈을 부릅뜨고

바닥을 찍고 수면 위로 올라오길 여러 번

고작 아홉 살 인생의 파노라마가 스쳤고    

 

이대로 죽는구나 싶을 즈음, 마침


혼자 살려고 도망친 줄 알았던 은영이

양옆으로 믿을 만한 튜브를 두 개나 끼고


물개가 된 듯 유려한 몸짓으로

나를 구하러 오고 있다, 이런 멋진 년

 

아, 살았다 참말로 사람을 안 믿으면 누굴 믿을꼬?


바닥을 쳐 본 사람은 안다


수영장 바닥이든 주식장 바닥이든

바닥을 치면 이내 수면 위로 탁, 오르리란 걸


그러니 그대

물 위로 떠올라야 할 이유만은 절대 잊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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