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살, 인생 바닥을 찍던 날
I.
그해 여름은 더웠고
국가 대표 급으로 수영을 잘하는
은영일 따라 처음으로 수영장엘 갔다
물속에서 자유자재로 유영하던 은영인
어린이 풀장이 영 시시한 모양이고
제 키를 훌쩍 넘는 성인 풀장에서
마치 수중 발레리나가 된 듯 보였다
반면 있어도 없어도 모를 내성적인 난
또래보다 작은 키로 어린이 풀장에서 배영을 배웠다
선처럼 가만히 누워 물과 하나 되고 보니
엄마 뱃속에 있던 것처럼 편안해
아, 처음 맛본 자유란 너무 달콤하여라
제 실력에 지나치게 자부심을 느낀 은영이
이번엔 내게 자유형을 알려주겠노라
성인 풀장으로 성큼 이끌었을 때
바들바들 떨리던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고
잔뜩 겁먹은 난, 은영이의 머리채를 잡았다
저만 믿으라 한사코 괜찮다던 은영인
어느새 나를 벗어나 멀리 도망치고 있었다, 나쁜 년
아무리 허우적대도 아무도 구해주지 않는
아홉 살 인생, 믿을 사람 하나 없더라
II.
소독 냄새 진동하는 물을 연거푸 마시며
수영장 맨 밑바닥을 수차례 찍던 날 깨달았다
바닥을 치면 올라가요.
시린 눈을 부릅뜨고
바닥을 찍고 수면 위로 올라오길 여러 번
고작 아홉 살 인생의 파노라마가 스쳤고
이대로 죽는구나 싶을 즈음, 마침
혼자 살려고 도망친 줄 알았던 은영이
양옆으로 믿을 만한 튜브를 두 개나 끼고
물개가 된 듯 유려한 몸짓으로
나를 구하러 오고 있다, 이런 멋진 년
아, 살았다 참말로 사람을 안 믿으면 누굴 믿을꼬?
바닥을 쳐 본 사람은 안다
수영장 바닥이든 주식장 바닥이든
바닥을 치면 이내 수면 위로 탁, 오르리란 걸
그러니 그대
물 위로 떠올라야 할 이유만은 절대 잊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