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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작 Mulgogi Jul 11. 2017

내가 바라는 나

CAMINO DE SANTIAGO

Trinidad de Arre/Uterga

+4 Day / 2016.07.08

: 21.2km (Iphone record : 26.8km)


오늘은 일 년에 한 번뿐인 산 페르민(San Fermín) 축제에서도 축제의 꽃, 엔시에로(Encierro) 소몰이를 시간 맞춰 보기 위해 우리 일행은 여섯 시가 넘어 여유롭게 알베르게를 나섰다. 일곱 시가 넘어 팜플로나(Pampelune)에 도착한 우리는 소몰이가 가장 잘 보일 것 같은 그랜드스탠드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소몰이가 진행될 골목의 높은 테라스하우스를 올려다보았다. 집집마다 소몰이를 보기 위한 사람들의 행렬이 이색적이다. 이내 그랜드스탠드도 사람들로 가득 메어졌고, 큰일이다. 내 앞의 키가 큰 관광객들에 가려져 엔시에로(Encierro)가 잘 보이 것 같지 않다. 그 와중에 탐나는 자리가 있었는데 그랜드스탠드 가장 윗 계단에 위치한 벤치였다. 벤치에 올라가면 소몰이가 훨씬 잘 보일 것 같았지만, 이미 발 디딜 틈 없이 벤치 위에 꽤 많은 사람들이 올라섰다. 내가 삐죽 거리며 계속 벤치의 발들을 쳐다보자 가여웠는지, 스코티시(Sottish) 남자가 '경기가 시작되면 여기 올라와서 구경해.'라며 선뜻 자리를 양보해준다. 나는 연신 'THANK YOU'를 연발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여덟 시 십 분 전. 어디선가 익숙한 억 센 사투리의 영어가 들렸다. 어학연수라는 명목이었지만 실은 어학연수가 주목적이 아니었던 나의 아일랜드 살이. 그곳에서, 지난 일 년간 내가 자신 있게 구분할 수 있는 건 역시나 아이리시(Irish) 특유의 발음과 억양이다. 예를 들어 아이리시(Irish)는 Five의 i [ai] 발음을 [oi]라고 하는 습성이 있다. Lighter는 /로이터/로 Writer 도 /로이터/로 발음하는 식이다. 그리고 특유의 억센 억양이 있는데, 마침 그 억양이 들린 것이다.


나는 바로 " Are you Irish? "라고 물었고, 여자는 자기는 브리티시(Briitsh)이고, 옆의 친구를 가리키며 그 친구가 아이리시(Irish)라고 한다. 고작 아일랜드에 일 년 살았을 뿐인데. 막상 아일랜드 생활을 접고  산티아고의 길에 오르니, 스페인에서 만난 아이리시(Irish)가 한국인처럼 반갑다.


이윽고 아침 여 덟시를 알리는 산 페르민 성당의 종소리와 함께 총성이 울려 퍼지고, 산토 도밍고 사육장에서 풀려난 소들이 투우 경기장까지 800미터가량 되는 거리를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곧 이곳은  흥분의 도가니가 될 것이다. 소몰이를 하는 시간은 4분 밖에 안되지만 나의 심장은 어찌나 쫄깃쫄깃해졌는지. 바로 투우 경기를 하는 소들과 함께 소몰이에 나선 용기백배의 참가자들 때문이었다.


사육장에서 풀려난 소는 성이 난 듯 뛰다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는 사람들을 뿔로 박아버릴 듯 리얼했다. 투우 경기를 위해 전혀 길들이지 않은 난폭한 소와 주최 측에서 준비한 길들인 소가 함께 뛴다고 한다. 그 양 옆으로 혹은 앞으로 붉은색 스카프를 맨 사람들이 소에 부딪칠세라 뛰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데, 바로 눈 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이라니. '정말 미친 짓이다.'라고 되뇌었다. 하나 그 용기만큼은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그래서 더 긴장되는 엔시에로(Encierro)의 짜릿함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엔시에로(Encierro)에 참가했다가 소에 부딪히거나 쇠뿔에 찔리고 소의 발에 밟혀 죽은 사람들도 있으며, 응급실에 실려가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사망자 대부분은 소와 현지의 특성을 모르는 관광객이었다고 하니, 멋모르고 엔시에로(Encierro)에 참가했다가 성난 소의 화를 돋우지는 말기를 바란다.

짧아서 더욱 아찔한 엔시 에로(Encierro)를 감상해보는 것도 좋겠다.

2016, 산 페르민(San Fermín) 축제/엔시에로(Encierro)


소몰이가 끝난 후, 흥분의 도가니 같던 팜플로나(Pampelune)를 벗어나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대학생인 베드로가 팜플로나 대학에서 스탬프를 받고 싶다고 하여 함께 가는 길에 팜플로나 대학 구경도 하고, 느지막이 길을 나서다 보니 이미 30도가 웃도는 스페인의 작렬하는 태양이 우릴 괴롭히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다 보니 그늘 진 나무가 나왔다. 나무 아래 마련된 벤치에서 싸온 과일과 바람으로 더위에 지친 마음을 달래고, 중간에 예쁜 마을의 성당에서 스탬프를 받고 기도를 드렸다.


부디, 이 길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들과 산 길을 반복 걸으며 우린 모두 기진맥진했다. 하나 축제를 즐기느라 늦게 출발한 탓에 오늘의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선 지친 몸을 이끌고 부진런히 걸어야 했다. 그러다 멀리 산봉우리 위에 하얀 풍차가 보인다. 휘가 농담 삼아 ' 우리, 저기 산 위까지 올라가는 건 아니겠죠? 설마. '라고 말했다. 나와 베드로는 ' 에이, 아니야. 저긴 아닐 거야.'라고 했는데. yes, yes, yes! 휘의 예감이 맞았다. 이상하게도 휘의 불길한 예감은 이후에도 잘 맞았다. 그래서 나와 베드로는 우스갯소리로 휘에게 안 좋은 예감은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보일 듯 말 듯 히미 했던 풍차가 이만큼 바짝 가까워지고, 뒤돌아 보니 우리가 걸어온 길이 까마득하게 보였다.

이제 산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페르돈의 언덕, 일명 용서의 언덕이 있을 터였다. 순례길에는 고해성사를 할 수 있는 성당뿐 아니라 화해와 용서로 자아성찰을 할 수 있는 장소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이해와 용서로 미움 없는 나'라는 노랫말의 이승환의 '내가 바라는 나'라는 음악이 떠오른다. 산티아고의 길을 걸으며 또 하나 좋은 점은 충분한 자아성찰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산티아고의 길을 처음 걷고 싶었던 이유도 머리 속이 복잡한 당시에 마냥 걷고 싶었던 때문이다. 걷는다고 무언가 해결되진 않지만 아무 생각 없이 단순히 걷다 보면, 머리 속에 난 생각의 골짜기도 하염없이 걷다 보면 말이다. 그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도대체 어디까지 가나 끝까지 따라가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결국, 그 생각의 끝이란 놈과 마주하게 된다.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된 적은 없는데, 이상하게 머릿속이 서랍 속 정리된 옷처럼 정리가 되고 한결 가벼워지곤 하는 것이다.


마침내 우리는 페르돈의 언덕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여러 개의 철 조각상과 그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기도 하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순례자들. 털썩. 자리에 주저앉아 배낭을 내려놓고 얼음물로 목을 적신다. 그제야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한숨 돌리고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햇볕 때문에 눈이 부셔 잘 보이지 않던 왼쪽 상단의 SEOUL을 가리키는 이정표. 한국인이 많이 찾고 있는 산티아고의 길이라 그런지. SEOUL 이 한 부분 차지하고 있다는 것에서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끼는 나는 뼛속까지 한국인이 맞다.

언덕을 내려오기 전 휘와 베드로는 페르돈의 언덕에서 멋지게 포즈를 취하였고 셋의 기념사진도 남겼다. 순례길을 걸을 때 일행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난로처럼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관계여야 한다. 우린 비록 4일 정도 동행했지만 서로가 배려하고 각자 어느 정도의 선을 지키며 걷고 있다.


앞으로 남은 여정 동안 얼마나 더 함께 걸을지는 모르겠지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지금과 같아라. 체력이 고갈되고 더위의 기습에 서로 예민해질 수 있는 상황이 오더라도 오늘, 용서의 언덕을 기억하길 바라본다.


페르돈의 언덕을 내려가기 전. 늘 앞장서 길안내를 해주는 베드로의 배낭, 인생의 무게가 유독 눈에 띈다.

페르돈의 언덕까지 오는 길이 끝없는 오르막이어서 정신이 혼미했는데, 복병은 언덕을 내려오는 자갈 산이었다. 누구나 꽃길을 걷고 싶지만 순례길을 온 이상 흙길까진 예상했지만 최악의 돌산을 만날 줄이야. 등산화를 신은 나는 그나마 발목이 보호되었겠지만 휘와 베드로는 발목과 발바닥에 엄청난 무리가 갔을 터라 걱정이다.


순례길을 걸을 예정이라면 걷는 동안 반드시 발목까지 감싸주는 등산화를 추천한다. 오르막이나 내리막 길에서 발목이 삐지 않도록 잡아주기도 하거니와 험한 산길에서 발바닥을 보호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정신을 가다듬으며 거친 자갈 산을 한발 한발 내려왔다.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우테르가에 도착했다. 자갈 산을 내려오면서 발목과 발바닥에 엄청 무리가 간 모양이다. 오늘의 목적지인 푸엔테 라 리에나(Puenta la Reina)에 가기 전. 우리는 우테르가(Uterga)에 도착해 점심을 먹었다. 부녀자들이 운영하는 위생적이고 시설이 좋은 알베르게와 바르(BAR)였는데. 순례자의 메뉴를 주문했는데 맛도 일품이지만 무려 계란을 두 개나 주셔서, 낙낙한 인심에 또 한 번 매료되어 오늘은 이 곳에서 머물기로 한다.

바르(Bar)와 넓은 마당에 노천 테이블과 햇볕 가리개용 천막까지 알베르게 구조와 시설이 제주도 게스트하우스 못지않았다. 무엇보다 부녀자들이 운영해 쾌적하고 위생적이어서 잠이 솔솔 왔다. 시에스타(siesta)를 한 차례 즐기고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시며 여유를 즐겼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노천 테이블에 앉아 있으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마치 배낭을 메고 거지꼴로 여행을 하다가, 럭셔리한 차림으로 휴양지에 와 있는 기분이랄까. 저녁이 되니 바람이 춥기까지 했다. 역시 오랜 고생 뒤에는 이런 당근 혹은 축복이 있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자연스레 생기는 긍정의 힘으로 '이 모든 건 주님의 뜻이겠거니' 하고 여기며.


자아 성찰하며 듣기에 좋은 음악.

이승환의 '내가 바라는 나'를 들으며, 부엔 까미노(Buen Camino)!


아무것도 모른 채 살 수 있는 나
아무것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나
내 주위 고마운 사람들 행복을 빌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넬 수 있는 나

아마 웃을 거야 철없던 날에 내 덧없는 바람
아주 오랜 후에 부끄럽지는 않을는지
내 부족함을 알고 욕심을 알며
내가 가진 것들에 의시대지 않는 나
이해와 용서로 미움 없는 나
사랑의 놀라운 힘을 믿어갈 수 있는 나

마지막 내 진정 바라는 나
더 이상 너 때문에 아파하지 않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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